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예레미야 17:9-11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70:4
다급하면 통하게 돼 있다. 미지근한 건 아직 살만한 것이다. ‘나중에’ 하고 미루던 고3 아이가 ‘진짜’ 예배에 왔다. 큰애는 여전히 싱거웠다. 그런 거 보면 위기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절박함은 다급함과 간절함의 합성어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에서 저는 말하길, ‘나는 시간을 낭비했고, 이제는 시간이 나를 낭비하는구나.’ 하고 절규했다. 돌아보면 아깝게 흘리고 온 시간이 허다하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오후 내내 남아서 공부를 했다.
나는 조용히 나가 모처럼 세차를 하고 묶은 떼를 씻어냈다. 여름내 나무에서 떨어진 진액이 엉겨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손이 가지 않으면 뭐든 엉망이 된다. 사람의 마음도 이에 다르지 않아서 막연하여 흐리멍덩한 건 뒤늦은 후회만 낳을 뿐이다. 생각도 행동도 씻어야 하고 심지어는 시간도 자주 닦아야 한다. 괜찮다 여겨두면 그중 생각이 먼저 녹슨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지난 주일에는 제주도로 출장을 가고, 다음 주일에는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는 아이에게, 예배시간을 기억하여 가까운 교회를 찾아 예배할 것을 말하였다. 그게 뭐 중요한가 하겠으나, 생각이란 참 고약한 것이어서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을 두기 마련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아이가 그리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다만 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맹랑한 시간은 우리를 조롱하듯 삼킨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5-16).” 시간은 항상 여지가 없다. 예외가 없다. 가차 없이 흐른다. 억지로라도 성경 봐라, 하고 이른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과 마음과 몸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차를 운행하지 않고 세워두는 시간이 많다보니 그 몰골이 거지 꼴 같이 되었다.
오늘 말씀은 이에 경고음을 울린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 두렵다.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이 왜 꼭 사람인가 하면,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외람되게도 후회한다. 분에 넘치고 때를 맞추지 못하고 사는 게 사람이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그러므로 주의 돌보심을 바라고 구하는 마음이 복되다. 안 그러면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다 늦어서야 ‘내 그럴 줄 알았다.’ 한탄하는 게 사람이다(렘 17:9-11).
나는 이를 말해주려는데 아이는 그저 싱거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하였다. 항상 아이의 미지근함이 안타깝다. 우린 주일을 중심으로 시간을 되사는 사람들이다. 잃은 시간은 그 값이 배나 더해 되사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된데 허비가 의외로 너무 중하다. 우리에게 허비되는 시간이란 하나님과 상관없는 시간이지 않나. 너무 애쓰지 마라. 나는 고3 아이에게 말했다. 그땐 대학만 가면 전부일 것 같지, 돌아보면 늘 우리 앞엔 넘어야 할 산이 놓였다. 마치 미궁 같다. 해결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주일을 중심으로 우리의 시간은 돈다. 왜 교회를 가고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말치고는, 그래서 되레 싱겁게 들렸을까?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세차를 하다 생각했다. 차라리 우리 사람도 기계라면 순순히 응하고 맡겨져 제 모습을 되찾곤 할 텐데, 하나님이 우릴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게 그래서 소름이 끼쳤다. 끝내 응하지 않을 땐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랬구나.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엡 5:15).” 정신 차려야 한다. 허투루 굴다간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22).” 주일을 중심으로 한 주를 다시 되사는 사람들이다.
설마, 하고 여기다간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여기에 없는, 생각은 있으나 몸이 따르지를 않는, 그야말로 좀비 같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자꾸 말씀 봐라. 기도해라. 미천한 글이나, 설교원고를 가지고 틈틈이 되새겨라. 당부하고 당부하였으나 돌아가고 나면 설교원고는 그대로 나뒹굴었다. 결국은 주님이 하실 일이다. 나는 그저 전하고 당부하고, 나부터 나 하나 온전히 하고 바로 살려는 사람일 뿐이다.
세차를 하면서 그런 생각까지 했다는 건 아니고, 찌든 떼를 구석구석 닦아내고 났더니 월요일 아침 또 비가 내린다. 흙탕물이 틔고 얼룩이 져 어제 세차한 게 모두 허사가 된 듯하다. 하지만 그래서 또 날이 개이면 차를 닦고 먼지를 털어내야 하듯 나의 한 날 한 날은 날마다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의 날’을 두셨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그래서 지금 고3 아이의 절실함이 귀한 것이다. 우리의 빈궁한 살림살이가 값진 것이다.
나의 연약함이 소중한 까닭이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좀 우스운 버릇이 하나 있는데, 종종 무얼 할 때 이게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점검하고 단속할 때가 있다. 가령 글방을 나서면서 다시는 여기에 되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상 위를 정리한다. 누구와 더는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몰라 더 뜨겁게 사랑하기를 바란다거나. 잠자리에 들면서, 일어나 앉아, 지금,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글로 쓰는 일에 있어서도 더는 이게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간절함도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때론 나의 약함이 강함보다 나은 것이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데 훨씬 유용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니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어려움이 어찌 어려운 것으로만 그치겠나. 그것으로 나는 성장도 하는 것이다.
딸애가 긴 한숨을 섞어,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하고 말하자 곁에서 아내도 덩달아 그리 말하였다. 딸애는 월요일에 다시 시달리며 또 출근해야 하는 일 때문에 하는 소리고, 아내는 도래하는 카드 결제 일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그래놓고는 둘이 위로하듯 낄낄거리며 수다를 이어갔다. 아내는 다들 잠들고 새벽까지 아이들 가르칠 수학문제를 풀며 교육방송을 보았고, 딸애는 다섯 시 반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튀어 일어나 세수를 하였다. 모름지기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와 같은 고달픔이 은혜라.
이를 우리 주님이 동정하시지 않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다 아신다.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 각자가 쩔쩔매는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누군 스스로를 무장하고 그것으로 누군 스스로를 해제한다. 주를 바란다는 건, 주일에서 시작하여 또 한 주간을 살며 그때마다 잃어버리는 시간을, 마음을, 행함을 되사는 것이다. 그때에 나를 붙드시는 게 있지 않나.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아니 그러한가. 나는 이제 더 좋은 수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는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그렇구나. 다급하고 절실함이 없다면 이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것으로 주를 더욱 신뢰하게 하시려는 거였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그러므로 복되다. 어느 것 하나 버려지는 게 없이 살게 하시려고,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하나님의 마음을 나에게 부으시는 거였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주님,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시 70:3).” 내가 누구를 의식할 것 없이,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 그 어느 때가 아니라 매순간이 그리 여겨질 수 있기를, 나는 기도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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