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전봉석 2017. 9. 9. 07:3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예레미야 15: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편 68:19

 

 

 

한 주가 금세 갔다. 우리는 모여 가정예배를 드렸다. 평소와 달리 주일 날 설교원고를 가지고 아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잠 28장). 쫓기는 자로 살지 않기를(1). 그러기 위해 성실한 자로(18), 충성된 자로(20), 지혜롭게 행하는 자로(26) 살아가기를. 굽은 길로 가는 자는 그 특징이 뚜렷하여서 자신보다 못한 자를 압제하고(15), 남에게 인색하게 굴며(8), 남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이다(17). 그러니 충성된 자란, 주를 경외하고(14), 말씀을 버리지 않으며(4), 정직하고(10), 사람을 보고 일하지 않으며(21), 악한 눈이 있는 자와 어울리지 않는다(22).

 

그러므로 지혜롭게 행하기를. 이는 사람을 경책할 줄 아는 자로(23), 부모를 공경하며(24), 여호와를 의지하고(25),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27).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었다. 때론 냉정하고 차가워서 말을 걸기조차 어려운 아들 앞에서 나는 말씀으로 대신하였다. 장성한 자식들의 눈치를 보는 게 어찌 보면 늙어가는 부모의 심경이겠으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늘 중심에 두고 말씀을 붙들고 생활하기를 당부하였다.

 

늘 빚진 마음이다. 안됐고 안쓰럽다. 하나 늘 우리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우리는 여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나누었다. 떨어져 생활하는 게 때론 안타깝지만 그것으로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부모로서 정말이지 한 게 없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잘 자라서 주님 앞에서 제 몫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 데 대해, 나는 감사하였다. 고마움을 표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란 모든 곳에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는 우리를 역경 속에서 인내하게 하시고 번영 속에서 감사하게 하신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27, 28문의 내용이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25:1).” 곧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34:7).” 우리 가는 길에 함께 하시며 돌보시고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나는 혼자 마음이 겅중거렸다. 오후께는 괜히 우울하기도 하였다. 좀 의연하였으면 좋겠는데, 나의 연약함은 나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바로 그때 우연처럼 로버트 갓프리의 <예기치 못한 여행>을 꺼내 읽었다. 저가 인도하는 말씀의 세계가 내게 딱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39:14).” 우리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던가. 정말이지 나는 한 게 하나도 없는데, 우리에게 맡기신 아들과 딸을 이처럼 훌륭하게 키워주셨으니.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

 

나만 모르지 나의 인생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 그러므로 더욱 주를 경외함이다. 나는 아이에게 일러 사람보지 마라. 돈을 보지 마라. 성공이나 출세를 바라보지 마라. 오직 주만 바라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일찍 공항으로 나가기 전에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아내와 딸애가 같이 배웅하였다. 같이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속상했다. 우리는 각자가 지고 살아야 하는 몫이 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가정의 교회의 소중함에 대하여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주의 것이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서로를 위해 서로를 두셨다. 날 위해 두신 생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의 마음이 조금은 유하여 따뜻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3:16).”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건 모든 게 그 기준이 분명하였다. 괴로워도 즐거워도, 슬퍼도 기뻐도 이는 다 주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이 땅에서의 생이 소중한 까닭은 그때를 준비함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2).”

 

나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함으로 구하였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을 다하는 날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되어지기를. 그리하여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하는 말씀은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내 안에 이는 여러 불안과 근심 걱정이 별 수 없이 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러므로 주를 바라며 나아가기를.

 

초딩 아이들 수업을 하다, 글쓰기를 접고 앞에 앉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너희가 아이들답게 순수했으면 좋겠다. 나의 말이 생뚱맞았던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약삭빠르고 되바라져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자기변호가 능란하고 무엇에 대해 핑계를 댈 땐 어른 뺨친다. 다른 아이들보다 갑절은 피로감이 몰려온다. 결국은 시 쓰기를 포기하고 왜들 그러는가, 듣고 싶었다. 참 애들 무섭다. 눈치가 백단이다. 부모의 통제와 간섭을 이유로 들었다. 엄마의 잔소리와 참견이 병적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그러는 것이라는. 그런 거보면 사람은 본디 자기위주로 우주를 굴리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어야 했던 어쩔 수 없음이기도 하겠다. 나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더 많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홀로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아들아이의 이런저런 사정을 아뢰며, 우리를 꽉 채우고 있는 자기변명과 자기만족으로부터 구하여 주시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 15:19).”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나다.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되찾기 위해, 기어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매순간 돌아가는 삶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선악과를 먹은 후 나무 그늘에 숨어 자신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숙명 앞에서, 어린아이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부모의 탓으로 엄마의 참견과 잔소리로 서슴치 않고 핑계 대는 그 맹랑함에 대하여.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이 고단한 짐을 주께 의탁하나이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55:14).” 그러자고 가족을 주셨다. 교회를 이루어 이 땅을 살게 하신다. ‘우리가 같이’ 가야 하는 길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자니 부모를 두둔하였고, 그럼 또 아이들은 원성을 높이듯 자신에게 부당하였던 것만 나열하였다. 그러게. 유난을 떠는 이 시대의 엄마들 때문이기는 하겠으나,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생활할 수 있기를.

 

그런 거보면 내가 주를 체험하는 게 어느 일부에서가 아니라 삶의 전체에서인 걸 알겠다. 나 혼자 있을 때도 혼자 두지 않으시고 책을 통해 하다못해 누구의 전화를 받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신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초등학교 아이들과 그런저런 얘길 나누면서 우리 아이가 겪었을 그 나이 때의 서운함과 결핍에 대해 생각하게 하시더니, 장성한 아들을 놓고 기도할 때에 무엇을 바라고 구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어느 것도 허투루 그냥 지나가게 하시는 법이 없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84:5-7).” 가끔은 생각하기를 나에게 시편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무엇을 구하고 바라야 할지 모를 때, 이보다 더 적절한 간구와 감사가 또 있을까? 뭐라 표현하기 힘든 마음의 서글픔에 대하여도,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119:97).”

 

결국은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96).” 말씀만 붙들고 말씀만 의지하면서. 아들에게 들려주었던 말씀과 기도가 오롯이 나에게 향하신 거였다. 그리하여 “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사 45: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