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예레미야 16:20-21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시편 69:6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말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보다 유순하다. 책임의 무게도 다르고 와 닿는 느낌의 결도 다르다. 가령 ‘우리는 주의 도우심을 바라야 한다’는 것과 ‘나는 주의 도우심을 바라야 한다’는 건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일반화된 나는 무력하다. 책임감에서도 한결 수월하다. 말하기도 쉽고, 뭐라 하면 숨을 데가 많다. 그래서 ‘나는’으로 시작하는 일인칭화법은 사방이 뻥 뚫린 곳에 덩그러니 세워지는 느낌을 더한다.
고3 아이가 엄마와 같이 글방에 왔다. 당장 수시 전형으로 여섯 군데에 원서를 넣어야 하는데, ‘자소서’ 비중이 높은 데가 세 군데였다. 세부적으로 백분율을 적용해 전국의 고3 수험생들 가운데 아이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지표를 보여주는 일은 아찔하다. 아이 위로도 숱한 아이들이 있었고 아이 밑으로도 숱한 아이들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으로 시작하면 한데 뭉뚱그려져 말은 순화하는데 ‘나는’으로 시작하려면 걸러내야 하는 게 너무 적나라한 것이다. 아이엄마는 돌아가고 아이만 남아, 자소서를 봐주었다.
그 내용이 ‘우리는’으로 빚어져서 온화하였다. 막연한 것이다. 두루뭉수리하게 읽혀 밍밍하였다. 그 시점을 바꿔 ‘나는’으로 구체적이어야 하며 직접적이어야 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 쉽지 않았다. ‘우리는’으로 있을 때는 가볍게 언급할 수 있는 문제들이 ‘나는’으로 그 시점을 바꾸려니까 시시콜콜 할 말이 너무 많거나 또는 아예 할 말이 없거나, 아이는 당황하여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어려워했다.
남의 이야기를 할 때는 대수롭지 않던 게 나의 문제로 가져오면 막연한 것이다. 우리 이야기로 상처를 대할 땐 인상만 찌푸리면 될 고통이지만 내 이야기로 가져왔을 때의 상처는 참으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어찌 말로 형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다’와 ‘나는 연약하다’는 엄연히 다르다. 직접적이지 않은 건 추상적이기 쉽다. 아이의 글을 봐주면서 ‘나는’ 새삼, 하나님 앞에서의 ‘나’와 ‘우리’의 차이를 생각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어떠하면 뭐하겠나, ‘너’는 과연 어떻다는 것인지! 나에게 하나님은 그렇듯 직접적이시다.
오늘 말씀을 그리 읽는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렘 16:21).” ‘그들’ 속에 내가 있어야 하는 일이고, 이를 알게 하실 때 모든 개별적인 ‘나’들에게 이르는 ‘이번에’다. 이번에 아이가 글방으로 온 게 아이엄마의 인사처럼 ‘이번에도 저희가 급하니까 이렇게 폐를 끼치네요.’ 하는 말처럼, 아내는 오래 전부터 가르쳤던 이 아이를 놓고 교회로 오게 하였으면, 하고 기도하였더랬다. 그러니까 이번에 이 일은 저에게 저의 필요에 의한 것이 되겠으나, 그것으로 하나님은 내게 비로소 아이를 대면하고 주를 증거 하게 하신다.
점심을 사주고 같이 기도하며 주일을 권하여 예배에 나오게 하였다.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다. 당장 다음 주 목요일까지 ‘자소서’를 제출해야 했다. 마침 딸애도 학기가 시작돼서 예배 후에 같이 점심을 먹고 방송을 듣고 공부를 해야 해서 그러자고 했다. 아이도 순순히 그리하겠다고 하였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 일은 가치 있겠구나, 생각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필리핀으로 출국하였다. 전화를 해지한 상태라 탑승하기 전에 통화라도 한 번 했으면 했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저는 또 저대로 ‘우리는’에서 ‘나는’으로의 변환이 이루어졌다.
모든 ‘이번에’ 모든 ‘그들’ 가운데 ‘나’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다가오심으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막연하여서 그저 어떤 기운 또는 보편적인 선, 신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곧 ‘내 이름이 여호와’인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나에게 고3 아이의 출현이 직접적이듯 저 아이에게도 ‘이번에’ 이 일이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계기가 될 것을 확신하였다. 그 확신은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보다 면밀하게는 ‘우리는’으로의 ‘나’가 아니라 ‘나는’으로의 ‘우리’ 이야기가 된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우리에게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나는 가져다가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어떠하든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 그 모습이 또 삶이 아직 화목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나서 저가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그저 일시적이어서 다급하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하겠다는 것이어도 괜찮다.
‘그러므로’에 해당되는 다음 이야기는 주님이 쓰신다. 나는 다만 ‘이번에’ 여기에 놓인, ‘우리는’에서 네 이야기를 써야 해. 네가 겪은 것, 그 가운데서 네가 느낀 것을 말이야. 하고 말한 것처럼 아이가 아이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 바랄 수 있는 마음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내가 점심을 사 먹이고 응원하고 격려하며 내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저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이번에’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느라 드는 고단함에 대해서는 나 역시 이번에 내가 겪어야 하는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말이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간을 고3 아이와 같이 있는 동안 나의 아들은 필리핀으로 돌아갔고 나는 서글펐으며 어떤 그리움이 또는 안쓰러움이 치밀었고 몸은 어디가 아팠고 마음은 어땠고, 하는 이 모든 ‘이번에’에의 일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렘 16:21).” 하는 ‘이번에’가 되는 것이다. 이번이 지나고 ‘다음에’는 아직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에’ 나에게 두신 이 상황과 아이와 여러 이야기와 이야기가 결국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는 데 있어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바란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 69:6).” 행여 나의 ‘이번에’ 고3 아이의 엄마가 표현한 것처럼, 나로 인하여 폐가 되지 않기를. 나로 말미암아, 주를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나의 연약함이 또 부족함이 저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는 데 폐가 되지 않기를.
어쩌면 나는 약간 병적으로 이를 염려한다. 내가 목사라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이, 저를 예배에 나오게 하는 것이… 이는 때로 나를 신중하게 하며 주 앞에서 더욱 성실하게 하지만, 병적이어서 주눅 들고 회피하는 자리에도 놓이게 하는 것이다. 겸손과 교만이 동시에 활동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나는 고3 아이의 절박함이 주를 마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면서 그게 행여 내가 중간에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겠는지, 염려도 한다.
가령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아이가 내가 좋아서 자신도 하나님을 믿는 줄 알았다는 전에 그 말이 상처가 되었다.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아무튼 그래서 저가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는 데 행여 내가 방해가 된 듯 하여서 말이다. 어려서부터 나를 좋아해서 내가 그처럼 좋다고 믿고 의지하니까, 자신도 무작정 그리했던 것이지 정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지 ‘선생님보다 하나님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던 말이 나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기도한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 69:6).” 행여 나의 이 기도가 오만한 자리에서 교만한 자의 기도로 드려지는 게 아니기를. 이러한 나의 생각이 또 현상이 상황들이,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9:110).” 말씀만 붙들고 말씀으로만 떠나지 않는 수밖에. 점점 나는 그리 여겨진다.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심지어는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라 날 위해서 ‘우리는’이 아니라 ‘나는’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114).” 나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듯이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며, 나의 말씀이 아닌 우리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116).” 천국이 아무리 좋다 해도 하나님이 안 계시면 무슨 소용이 있고, 그 하나님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나와 상관없는 이시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아들을 생각하고 딸애를 사랑하며 아내를 소중히 여긴다 한들, 결코 ‘우리는’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우리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나로 하여금 그리 되게 하시는 데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아들에게도 그리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살아서 ‘이번에’를 같이 지나게 하시는 모든 ‘우리는’에게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내 입의 이 단맛을 어찌 맛보아 알게 할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렘 16:21).” 그 자리에 나는 증인으로 서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시 119:111).” 내 남은 영원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69:5).”
고로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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