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전봉석 2017. 10. 19. 07:24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애가 3:26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안 되겠다 싶어 가정예배를 저녁에 교회에서 기도회로 하기로 했다. 서로 자꾸 부딪치고, 조금은 안이하며 막연하여,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내버려두고, 나 몰라라 외면하는 것에 대하여,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을 주셨다. 어차피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린 후에 운동을 나가네, 동네 한 바퀴를 도네 하면서 아내의 행동반경도 그렇고. 딸애가 정상적으로 퇴근하면 도착할 시간도 그렇고, 마주 앉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였다.

 

애가를 통해 내가 얻는 교훈은 애통해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가 말이다. 그러라고 고통도 주신다. 그래서 축복의 통로이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0-23).”

 

입시철이라 딸애는 연일 야근이었고, 아들애는 이번에 수원시에서 오는 무슨 봉사단 통역을 맡았고, 11월에는 정상회담에서 아르바이트로 뭘 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늘 발을 동동거리며 살림을 꾸려가느라 마음이 조바심쳤다. 다 좋은데 주 안에서 해라. 믿음 생활 바로 하고 하나님 앞에 성실해라. 아들과의 통화에서 당부하였다. 나름 내 주변엔 성공했다는 인물이 있다. 누군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서 인정받았고, 누군 의사로 또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듯 잘 나간다. 그러니 겉은 그런데 속은 문드러져 골골하다. 하나님과 멀어진 지 오래고 다들 나름 그 고집으로 ‘열일’ 한다.

 

너무 애쓰지 마라. 사느라 드는 여념이 없음에 대하여, 그러느라 주를 멀리하는 일이 없기를 나는 당부하고 또 부탁하였다. 어차피 돌이켜야 할 길 위에서 바른 길로 무던함이 복일 텐데.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24-25).” 비로소 알기까지 고난은 복된 것이었다. 어렵고 힘듦이 은총이었다. 그것으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6).”

 

주를 우선하는 삶이어서 그 모든 수고가 수고로움으로 허덕거리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으면.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27-28).” 가끔은 아들아이의 포부가 나는 위태위태하다. 그래서 자꾸 노인네처럼 같은 말을 당부하고 또 부탁한다. 무슨 일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주일을 먼저 묻는 것도 그래서이다.


백날 용 써 봐야 소용없다. 천만금을 얻는다 해도 필요없다. 성공과 출세, 심지어 행복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 그걸 그냥 극복해야 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잘못이다.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38).”

 

사악한 세상이다. 점점 겁 없는 게 문제다. 중2 아이는 사귀자고 한 지 며칠 만에 뽀뽀를 했다는 둥 손을 잡았다는 둥 낄낄 깔깔 요란하였다. 서슴없이 그런저런 말을 해주는 게 고맙기는 한데, 나는 자꾸 노인네처럼 ‘그럼 안 돼’ 하는 소리만 늘어갔다. 하긴 이제 초딩 4학년 아이가 6학년 아이를 사귄다면서 어른들이 쓰는 용어로 사랑을 고백하고, 화장을 하고 온통 관심이 거기에 쏠려 정신이 없다. 곁에서 다른 애들은 부러워하고 그래서 더 과장되게 무엇을 실행하면서, 악순환이다. 장난이 아니다. 위태위태하다.

 

교회에 나오라는 소리는 콧방귀로도 안 듣고 뭐라 하면 또 그런다, 하는 식으로 치부하고 만다. 하나 같이 그 부모 눈을 피해 저리들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니, 혼자 떨어져 필리핀에서 생활하고 있는 다 큰 아들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 할까. 아내가 염려에 걱정을 더할 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고, 주를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내 속이야 오죽하나. 의연한 척 굴어도 정작 신경쇠약으로 약을 먹는 사람은 나였다. 나의 약함이 복이었던 것이다. 주만 의지하게 된다.

 

여기서 기다림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40).” 돌아보아 자신을 더욱 주 앞에 바르게 세우는 일. 매일 저녁에 예배를 교회에서 드리자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1).” 쏠려가는 우리의 마음과 분주하기만 한 손을 아울러 하나님 앞에서 들자.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49-50).”

 

그리하여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얻는다. 주를 바랄수록 내가 얼마나 누추한지, 세상이 얼마나 주께 등을 돌렸는지, 저 아이들이 얼마나 주와 멀어졌는지, 우리가 사는 이 한 날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처량한지. 끝도 없는 근심과 걱정으로, 고통과 탄식으로 내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을지라도, 주가 살피심이여. 그러므로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이를 아는 까닭에 나는 이제 다른 위로를 찾지 못한다. 모든 게 허상임을 안다.

 

헛것을 붙들고 살던 날들을 돌아보며, 아이들이 부디 먼 길을 돌지 않게 하시기를. 안 믿는 가정에서 자라고 안 믿는 아이들의 심령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비로소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19-20).”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기도라. 겁 없이 구는 아이들의 막돼먹음을 두고 우리는 대신 주의 이름을 부른다. 가난하고 못 생기고 억눌렸던 마음에 남자아이가 생겼으니 그 위로가 얼마나 클까.

 

뭐라 한들 들으려 들지 않는 아이를 두고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 주께 바라고 구함으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21).” 그러므로 우리에게 행하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 초딩이든 중딩이든 같은 연예인을 부르짖으며 우상처럼 떠받들고 저들 음악을, 사진을, 공연하는 동영상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이 애호한다. 선생이 뭐라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두신 게 그런 것이구나. 아내와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31).” 주가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돌이켜 주 앞에 세우실 것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을 하게 하실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 같다가도 내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나는 결코 내가 이런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굳이 남의 일에 관여할 여력도 없지만 냉혹할 정도로 관심도 없어하던 사람인데, 내가 늘 저 아이의 이름을 노트에 적고 주께 구하여 기도하고 있을 줄이야.

 

어쩌면 이것이 허비일지 모른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괜한 짓일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3-4).” 그럴 수도 있겠다. 백날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고, 그러다 휑하니 그만두고 연락도 없으면 더는 아무 것도 아닌 사이인데. 내가 대체 저 아일 위해 기도한들. 그 이름을 주께 아뢴들.

 

어린 게 되바라져서 벌써부터 옷 입는 거 하곤. 그 엄마가 미장원을 한다나봐. 엄만 더 야해. 그러니 공부는 안 하고 온통 신경이 딴 데 팔려 있으니. 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시빗거리를 주께 고한다. 내가 저를 비난할 일이 아닌 것이다.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돌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런 애를 주가 지금 우리 앞에 두신 게 아닌가. 비록 우리의 마음 씀이 허비라 해도. 저 아이를 두고 주께 아뢰고 구하는 일이 헛되어서 화가 나는 일이라 해도. 그러므로 주를 부르는 수밖에.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 23:16-17).”

 

도로 주께 부어드리는 일. 그러자고 다짐하였다. 늘 우리 가족만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니라, 기도할 줄 모르는 또 아무도 기도해주는 사람 없는 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였다. 그 부모가 기도할 줄 모르고 아이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에 대하여, 그러라고 오늘 우리를 여기에 두심을 아내와 함께 재차 확신하였다.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한심할 정도로 화가 나고 또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서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기로. 그러라고 애들을 보내시고 오늘 우리 곁에 두신 것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그러므로 묵묵히 또 무던하여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오늘 말씀을 깊이 들이 삼킨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더욱 주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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