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애가 1:1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18-19
애곡하고 애통하는, 슬퍼할 줄 아는 자가 바른 기쁨도 성취한다. 자기를 위한 슬픔이야 주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주를 위한 애가는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고 간다는 것.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사는 데 따른 고달픔과 인생의 역경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누구나 그럴 것을 일컬어 그리하라 하시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럼에도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회피와 모색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 주의 남은 고난, 결국은 주를 바라며 구하느라 얻는 어려움에 대하여 하신 말씀일 텐데.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나를 두신 이유이겠고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일이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하실 때, 애통하는 일이 어찌 복 받을 일이겠나만. 그럴 줄 아는 마음이 오늘 예레미야의 심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겠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 1:1).” 그럴 줄 알았나. 결국은 그리 되었고, 그리 되고 난 뒤에야 결국의 결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니.
끝에 이르러봐야 안다. 갈 데까지 가야 아는 일이다. 이를 앞서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인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두고 슬퍼할 줄 아는 게 애통함이겠다. 어찌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무게에 대하여 주를 바라는 일.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8-19).” 말씀이 응할 때까지!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이 그러하셨고, 오늘의 내가 또한 그러하여야 할 일이겠구나. 말씀이 단련하신다!
햇살이 들 때와 구름 뒤로 가려질 때의 차이가 큰 하루였다. 낚시를 좀 갔으면 하다 그만두고, 딸애의 교육방송을 대신 들었다. 리포트도 대신 써주게 생겼다. 너무 힘에 부치니까 시작한 학업을 중단하겠다는 걸 그리 격려하며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하고 일렀다. 그 가운데 미술심리치료나 청소년 보건학 같은 경우는 관심이 갔다. 그래봐야 건성으로 듣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격려하고 다독여 함께 갈 수 있게 하는 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저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맞추는 게 신앙이겠다. 사랑이란 저의 선호를 나의 선호도로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흠뻑 빠지는 일. 개인적으로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내 사랑하는 이가 그것을 좋아하니까 나도 그리 되어지는, 닮아가는 일이었다. 더불어 저를 주의 마음으로 대하고 마주할 수 있는 일. 예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는 것. 그래서 누굴 대할 때 저를 두고 혀를 끌끌 차면 내가 아직 덜 된 것이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지? 싶다가 나 같은 이를 사랑하셨는데, 하는 마음에 고개 숙이는 일이다. 다른 이는 어떤가 모르겠는데 나는 이와 같은 마음이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누구에 대해, 어떤 일에 있어서 비난하고 뭐라 욕을 하다가도 저를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들면 입을 다물게 된다. 왜냐하면 최소한 나는 더했으니까. 나 같은 자도 사랑하셨으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그렇겠구나.
최소한 내가 저이보다 낫다고 여기는 한 어림없다. 주님의 가르침은 너무 멀다. 어찌 감당이 되겠나.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5-36).” 그러다가도 주가 나를 사랑하신 데 따른 감격이 또 은총이 깃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주의 마음으로 말이다.
늘 혼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민망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게 어떤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보다 어렵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어쩔 땐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마음 앞에 내가 놀란다. 혼자서 끙끙 앓다가도 저를 대하면서 눈 녹듯 녹는 마음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그렇구나. 가끔은 나의 신세가 처량하게 여겨지다가도 이게 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릴 때 날 위해 기도하던 소경 장로님을 생각하면(이젠 저의 이름도 잊었다.) 저들은 시력을 잃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특히 저는 서울대 출신에 나름 꿈이 많은 청년이었다. 어느 순간 한센인병에 걸렸고 소록도로 거쳐 여수 애양원으로 정착하는 동안 가족들은 떠나갔고 두 눈을 잃었다. 몸은 뒤틀렸으며 사지는 굳어졌다. 그렇듯 저들 소경이 모여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성경 테이프를 듣고 또 듣는 일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는 성경 66권을 다 외웠다. 저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이 하나둘 동참하여 그 교회 소경인들이 동참하였다. 두 눈이 멀쩡한 사람들 가운데는 없었다. 성경 66권을 통으로 다 외우는 사람들이 말이다. 어릴 때 나는 그것이 신기해서 아무 곳이나 성경을 펼쳐 어디, 몇 장 몇 절! 하고 외치면 저는 정말로 술술 암송하는 거였다. 때론 내가 성경을 읽을 때 잘못 읽은 걸 지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나는 저가 쓴 짙은 안경이 최첨단 무슨 ‘007 안경’은 아닐까, 상상도 했었다. 나에게 있어 저에 대한 생각은 오늘까지도 감동을 준다.
이러고 있으면 뭐하나, 싶다가도 그래서 한 번 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구나 싶은. 남들이 보기엔 저의 삶이 비참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겠으나 저에겐 그 인생으로 주를 마주하고 동행하는 데 너끈하였고 충분하였다. 훗날에 내가 결혼을 하여 지금 우리 두 아이가 어렸을 때 ‘억지로’ 같이 그곳에 들러 인사를 갔던 적이 있었다. 방은 누추하고 혼자 생활하는 삶이란 게 옹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저의 삶은 결코 어둠 속에 갇힌 게 아니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혼자 있다 문득 저를 생각하면 절로 힘이 난다. 저의 흘러넘친 생수가 오늘의 나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육체를 신뢰하지 말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 3:4).” 그럴 거 없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이러고 있는 게 무슨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겠나, 싶다가도. 저가 만일 소경이 안 되었다면 최소한 성경 66권을 통으로 다 외우며 살아갈 수 있었겠나?
외롭지 않고 어떻게 책을 읽겠으며 고독하지 않고서야 어찌 주를 묵상하겠나! 공연히 분별없는 애착만 생겨날 수도 있다. 누가 보든 말든.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성도란 그런 것이다. 타당한 이치와 논리로 오늘을 재해석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무모함으로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거였다. 그러하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리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피하고 극복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를 힘쓰고 구해야 하는 일이었구나. 나는 혼자 들어앉아 어슬렁거리듯 책을 읽고 주를 바라며 누굴 생각하였다.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을 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책을 읽고 메모를 하고, 이처럼 성경구절을 따라가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이는 좋으냐 싫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무던함의 일이다. 그리 두시는 이를 신뢰하는 것뿐이다.
저들이 두 시력을 잃고 어찌 무던할 수 있었겠나.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애통하며 애곡하였을까. 어린 내게 소경 장로님은 말했었다. 몇 번을 죽으려고 했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대체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나는 혼자 있으면서 혼자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주님과의 교제가 점점 풍성해지는 걸 느낀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되새겨 그 의미로 가슴 벅찰 수 있는 일. 그게 어디 내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었나. 주가 하신다는 걸 애가는 알게 한다. 애통함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할 수 있게 하시는 거였다. 아이를 생각하고 아이에 대한 마음으로 내가 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줄이야. 비로소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8-19).” 왜 그런지 이제는 알겠다.
고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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