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예레미야애가 4:17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편 108:12-13
이웃하고 있는 저쪽 사무실에서 누가 왔다. 평소 얼굴은 익혀 복도에서 마주치면 서로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처음 들어와 보는 글방을 신기한 듯 살피며 이런저런 말을 이어갔다. 누구에게 무장을 해제하게 하는 상대가 되어 다행이었다. 어느 사무실의 누가 어떤 소송이 걸려 있는지, 남의 말을 하다가 자신의 딸자식은 어떻게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왜 그런 말들을 나에게 들려주나, 나는 주께 물으며 가만히 있었다.
은연중에 그런 사람이 되었다. 느닷없었다. 방심하고 있을 때 훅, 들어온다. 커피를 대접하고, 저의 말을 들어주고, 언제든 또 오시라 하는. 저가 돌아가고 나의 입장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는 사람. 이런저런 저의 말을 옮길 수는 없으나, 현실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사람은 없다. 그리 여겨지고 되어주는 상대이다. 목사니까, 하는 어떤 허울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이 말 저 말을 하게 되는, 앞에 찾아와 현실을 풀어놓게 되는, 그러라고 우리를 현실에 두시는 거였다. 하나님의 목적을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스물한 살인 자기 아이를 보내겠다는 것인지. 자신이 나오겠다는 것인지. 그냥 들렀다는 것인지. 나는 저가 돌아가고 주섬주섬 저의 말을 주워 담다 그만두었다. 더러는 그와 같은 느닷없음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기시킨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그저 시늉만 내는 것처럼 별 거 아닌 사람이지만, 주가 계신 것이다. 내가 주목해야 할 게 무언가를 눈여겨보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하는 의지적인 참여를 요구하시는 거였다. 나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놓고 말이다. 혼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을 어찌 아는가, 내가 나를 알리지 않는데도 주가 하실 거였다. 결국 내 관점에서 생각하고 말하지 않기. 할 말이 없으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된다. 저가 한참 말하고 있을 때 나는 슬그머니 안정제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만가지 생각을 포기하였다. 참 평안해보이세요. 저의 말이 나는 이해가 안 간다.
고달픈 삶에 대하여. 다들 번듯하니 잘만 사는 줄 알았는데, 저 옆에 어느 사무실은 어디에 20억의 빚이 있다고. 누군 또 뭐가 엮여서 계약을 이중으로 한 거라고. 자신은 어떻고.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아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애 4:17).” 말씀이 진리다. 나는 아침에 말씀 앞에 앉아서야 왜 전날에 저가 와서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는가, 알 것 같았다. 때론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에 교회 목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교회 옆 오토바이 주인이 평일 낮인데 술 냄새를 풍기며 찾아왔던 얘길 해주었다. 교인도 아니고, 평소 이웃하고 있는 안면이 있는 정도인데 느닷없이 찾아와 이 말 저 말을 해대니까, 술 냄새까지 나서 그냥 돌려보냈더란다. 그런데 다음 날 저가 자살을 했다. 그때 목사님은 몇 날 며칠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괴로웠다고 했다. 나는 종종 그 말이 생각난다. 때론 부당하고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주님은 엉뚱한 걸 요구하신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1-42).” 말이 쉽지, 우리가 서로 그런 말을 나눌 사이도 아니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사이로써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저녁에 아내가 나와 같이 기도회를 하면서 그 얘기를 해주었다. 하면서도 다시 생각해도 그래서 왜 그 사람이 와서 그런 얘길 나에게 늘어놓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인데도 묵묵히 그래야 하는 것은 주의 이름 때문이다. 교회로 알고, 목사로 알고 찾아온 이이면 저가 나를 보러 온 게 아닌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주님은 영적인 눈을 열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래서 더 방심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 얘길 왜 나한테 합니까? 하고 되물을 일도 아닌 것이다. 그냥 그렇게, 때론 당해야 하는 일이다.
오 리를 가자는데 십 리까지 가줘야 하는 사람이다. 억울할 거 없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 이와 같은 부당함 앞에서도 묵묵하여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39).” 자발적인 참여를 요구하신다. 억지로, 느닷없이 당하는 게 아니라 이젠 자원하여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건 날 위해 먼저 그리 하신 주의 사랑을 내가 알고 믿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의지적으로 내가 관여하는 일이다. 내가 왜? 하는 어떤 셈법이 앞설 때 더는 할 수 없다. 어떤 논리와 설명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다들 헛된 것을 구하고 사는 세상에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2-13).” 나의 대적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한다. 내 안에서 셈을 하는 뚜렷한 자아가 있다. 계산이 명확하여 손해 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오 리를 가자하면 십 리를 가주는 값을 청구하려 든다. 그래서야 어디 쓰겠나.
주만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이를 바로 알게 하시기를. 그러기까지 팽팽하게 당겨지는 인내가 필요하였다. 비록 나는 의연하지 못해 그 예민함을 못 이겨 약을 먹어야 할 정도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 가운데 주님이 계심을 신뢰하는 일. 때론 넘어지고 실패한다 해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는 일. 주가 하시게 하는. 그러기까지 나는 무던히 나에게 두신 현실을 주의 이름으로 채워가는 것.
오후 네 시, 한 차례 상영하는 <루터>를 보러갈 거였는데 덕분에 시간을 놓쳤다. 모든 상황과 여건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 모든 게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고. 내게도 자발적인 참여를 더하시기를. 이는 어제 묵상했던 것처럼 내가 부어지는, ‘옥합의 삶’이 아니겠나. 왜 허비하느냐? 하는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는 감당이 안 되는 사람.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아!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 12:7).”
혼자 있으면서도 다양하다. 아무 일도 아닌데도 엄청난 일을 엿본다. 주님이 이루시는 나의 현주소이겠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따르게 하심으로 주가 계신 곳에 나를 있게 하시는, 주를 섬김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귀히 여김을 받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6:29).” 주를 안다는 건 매사에 주의 관여를 목격하는 일이겠다.
더디지만 분명하고 느리지만 확실한 것. 때론 묘연하여 헛소리 같기만 한 것을 두고 묵묵히 주가 이루시는 일에 주목하는 일. 그렇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그래서 내 안에 산 고백을 담으시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고로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리하여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그게 교회였다.
나를 두신 까닭으로 나로 있게 하시는 이유였다. 새삼, 우리가 얼마나 헛된 것을 좇고 사는지. 다들 그러하여 얼마나 곤고한 영혼으로 내몰리고 있는지. 서로의 피폐한 영혼으로,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애 4:17).” 그러고들 있는 것을. 그러므로 주께 아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2-13).”
곧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1).” 오직 주만을 바라며.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2).”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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