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 나오는도다

전봉석 2017. 10. 22. 07:31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에스겔 1:28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 간 것으로 끝이 아니다. 멸망과 회복은 주님의 권능 아래에 있다. 이제 성장하여 주 앞에 설 수 있는 때에 에스겔은 환상을 보고 예언을 듣는다. 한 번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끝이 없으시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누군 이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

 

곧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들을 수 있는 귀와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게 귀하다. 곧 주의 권능의 날이면 가능하다. 주가 행하시고 주께서 이루신다는 것. 그 놀라운 현장에 주가 세우신다는 게 귀하다. 주의 권능의 날에.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이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은 때에. 나는 말씀 앞에서 영광을 상상한다.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주의 청년들을 생각한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 119:49).” 나도 주께 구한다. 내게 소망을 두셨나이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71:14).”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소망이 끊어지면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을까? 이를 붙들어 굳세게 하는 것이 믿음이면 이를 온전히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주의 사랑이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내가 애써서 이루는 사랑이 아니다. 내 안에 두시는 주의 사랑이다.

 

그 마음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어서. 이 꼬맹이 녀석들이 카톡방을 만들어서 나를 두었다. 한꺼번에 100개 이상의 대화가 걸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다. 바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또 개인 톡을 하여 불러댄다. 아내와 딸애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초딩 4학년 아이들이 뭐하러 나를 자기들 방에 불러서 자꾸 말을 거는 것일까? 주일 날 남친(6학년 아이)도 데려온다고. 엄마 일터인 미장원엘 갔는데 심심해서 차 안에 혼자 나와 있다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토요일 연장 근무가 끝나고 여덟 시에 딸애가 퇴근해온다고 아내가 같이 나가자고 했다. 떡볶이와 순대가 먹고 싶다 해서, 기껏 저녁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따라나섰다. 그런데 토요일 밤거리는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요란한 음악 소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삼삼오오 모여 온갖 욕을 섞어가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난 그냥 집에 간다는 소릴 여러 번 했다가 결국 딸애를 만나고 같이 분식점엘 들어갔을 때 아뿔싸 위경련이 일었다. 식은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려 토하고 싶었다. 결국 먼저 집으로 돌아와 약을 먹고 누웠다.

 

아이들 단톡방에는 수백 개의 대화 내용이 걸려 있었다. 왜 하필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러실까? 아내와 딸애가 깔깔거리며 초딩 애들이 귀엽다며 나의 카톡을 보고 놀렸다. 가끔은 하나님보다 이해가 안 되는 이가 또 계실까? 아내가 하면 잘 할 텐데, 신기하게 애들이 또 아내는 무서워 한다. 딸애는 그런 걸 성가셔하고. 나도 좋아하는 건 아닌데 무덤덤하니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내게 아이들은 낄낄 깔깔 편하게 구니까 고맙기는 한데,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을 두시지 왜 나 같은 자를 여기에 두셨나.

 

이젠 아예 숙맥이다. 하등에 어디 쓸 데가 없다. 왁자지껄 아이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는 데 정신이 없다. 쿵쾅대며 울려대는 음악소리에 속이 다 울렁거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막 구는 어린아이들의 거침없는 행동이 두려울 정도다. 밤 시간 역전 광장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온만 사람이 다 모여 지랄발광을 하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담배를 펴대고 아무 데나 침을 뱉어대고 욕지기가 난무하고 거침없이 웃어대는, 전혀 서로를 개의치 않는 무질서의 현장이지 않나. 기어이 위경련을 일으켜 도망치듯 먼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인데, 아이들과 어울려 뭘 같이 해줄 수 있는 위인도 못 되는데,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게 어렵기만 한 사람인데… 푸념처럼 이어지는 나의 변명에 아랑곳도 않으시고, 듣게 하신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내가 보고 말씀 앞에 엎드리게 하신다. 귀 기울여 듣게 하시는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주가 하실 것임을. 나를 현장에 두심으로 목격하게 하시려는가. 종일 들어 앉아 딸아이 리포트를 대신 썼다. 각각 다섯 장씩 열 장의 원고였다. 고령화 사회의 노인 복지 문제나 청소년들의 흡연 실태와 그 예방 교육에 관한 주제들이었다. 그래봐야 인터넷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고 짜깁기 하여 앞뒤로 내 의견을 덧붙이는 정도의 것이었으나, 각각 서너 시간씩 족히 토요일 한 날을 다 잡아먹었다.

 

그러니 내 말이.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도 어려운 사람이 이 또한 무슨 날벼락인가 말이다. 다음 주까지 3주째 야근이 이어지고 주말에도 출근하여 입시와 면접을 관리하는 입시학사관리직원이란 게 뭔지. 딸애가 툴툴거리며 기껏 어렵게 시작한 공부를 그만둘까 한다고, 그걸 대신 듣고 당장 다음 주 초에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까지 써주고 있으니. 어쩌다 건물 사장이 두 번씩이나 왔다가 뭔가 대단한 일이나 하는 줄 알고 돌아갔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자료나 책들, 정신없는 글쓰기에 뭐하나 싶었겠다. 볕에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 한 날 같은 창가였다.

 

주를 따른다는 거.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내가 주를 섬긴다는 건 묵묵히 주가 두신 자리에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주님은 왜 이런 데 계시나 싶은 곳에 계신다. 저런 사람한테 왜 관심을 두실까, 싶은 사람만 골라서 다가가시는 것 같다. 그럼 토요일 날은 글방에 와. 나는 아이가 엄마를 따라 미장원에 나가고, 안 그러면 하루 종일 혼자 있어야 하니까 엄마는 또 불안해서 아이들 끌고 나가는 것인데. 오죽 지겨우면 가게 앞 엄마 차 안에서 늙은 선생한테 카톡질이나 해대고 있을까.

 

신기한 건 오라고 하면 또 안 온다. 그래서 주님도 직접 찾아가셨나? 내가 주를 섬긴다는 건 그런 주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있는 것이겠다. 그게 볶여서 위경련이 이는 한이 있어도,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아, 그래서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게 먼저였구나. 내 취향, 내가 선호하는 사람, 바라는 장소 또는 좋아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나를 부인하는 일. 앞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기 십자가였다.

 

주님 때문에 지는 것. 아이를 대하고 저 사람을 마주하며 이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게 실은 다 주님 때문이었다. 주를 섬긴다는 건 그런저런 나의 사정과 여건까지도 십자가로 지고 주를 따르는 일이었다. 한 중년의 남자가 반듯하게 옷을 입고 전도지를 돌리고 있었다. A4 용지 앞뒤로 가득 성경구절을 쓰고 맨 아래에 괄호로 묶어 ‘가까운 교회에 나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는 내용이었다. 아내와 둘이 딸애를 기다리다 받고 처음엔 이단인가? 하여 반으로 접어 읽지도 않고 손에 들고 있다가 읽어보고 알았다.

 

저는 또 어떤 부르심을 따라 주말 저녁 저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두 번째 다시 마주쳤을 때도 전도지를 건네서, 받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며 자세히 저를 보았다. 마흔 중반의 교회 목사이겠지. 저자가 돌린 용지는 곳곳의 벤치에 누가 깔고 앉았었는지 여기저기 눌린 채 눌어붙어 있었다. 어떤 서글픔이 또는 안쓰러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아무도 눈여겨 읽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그저 이단인가, 하여 반으로 구겨 들고 있던 것이어서.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3).” 저는 어느 훗날 주 앞에서 칭찬 받는 자리에 설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부디 저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리를 굽혀 예수 믿으세요, 할 수 있는 저의 용기인가 헌신인가 싶은.

 

내 안에 여러 장의 장면이 중첩되면서 나는 과부하가 걸렸던 것이다. 고작 그 정도도 안 되는 사람이 싸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속을 진정시키는 약을 먹고 누워서야 알았다. 내게 참 은혜가 크다.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을 주께서 이처럼 세우시고 거두시는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1).” 다윗의 시가 내 것이지 않은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2).”

 

나는 기도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3).”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주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시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리니.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시 110:7).”

 

그러므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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