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에스겔 2:8-9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편 111:10
의외로 스파게티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면을 삶아 기름을 두르고, 불지 않게 교회로 가져왔다가 예배 마치고 다시 프라이팬에 돌려 소스를 붓고 비벼… 그것으로 모자랄 것 같다며 주먹밥도 따로 준비해서… 그런데 아이들은 별로 먹지 않았다. ‘교회를 다녔었다’는 과거형 답변이었고 부모는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심한 듯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왜 긴장했던 탓인지 위경련이 일어 오후 내내 속을 달래느라 애먹었다. 애들인데 왜 싸해? 아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상하게 여겼고, 그러는 나도 내가 이상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는 것, 우리 안의 아간과 같은 속성을 인정해야 하고, 아골 골짜기 같은 우리의 현실을 오직 주를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아이에게 설명해주어야 했다. 문제는 별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키득거려 내 혼이 나가는 줄 알았다. 내가 스스로 어찌 해보려고 하니까 속이 볶였던 모양이다. 주께 맡겨야지 하면서도, 내 그릇이 참 얕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그래도 감사한 건 아이들 부모가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쁘게 머리를 묶어주었다는 말에 어떤 희망을 느꼈다. 따라온 남자친구아이도 당돌하였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 어떤 트라우마가 생겨 안 나갔다고 대답했다. 보통이 아니겠다. 해가 바짝 들어서 교회는 한 여름처럼 더웠다. 좀 의연했으면 좋겠는데, 난 자꾸 뭘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일까? 언제쯤 되면 나도 온전히 주께 모든 걸 맡기는 날이 오기는 올까? 설교 중에 몰래 안정제를 삼키면서 그러는 내가 이상하였다. 나와 상관없는 나였다.
때론 생각하기를 지름길은 없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이 마땅한 진리 앞에 나는 의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누굴 의식하면서 그 느낌과 감정과 기분을 살피느라 신경이 곤두선다. 내가 의연하길 바라는 것보다 육신을 떠나는 게 더 빠른 일일 것이다. 그러는 내게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별 수 없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이게 딱 선을 긋듯이 분리되어 내가 그 가운데서 자유로웠으면 좋겠는데, 이것보다 교만한 바람이 또 어디 있겠나. 마치 나는 지름길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 이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왜 나는 이처럼 예민하게 구는 것일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이런 말씀이 위로가 된다.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경거망동하며 살았던가. 행여 또 그럴 것인가. 함부로 굴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나만 보시려고. 아니,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이내 예수밖에 다른 길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렇지. 나는 그리 짐작했고, 그러므로 쩔쩔매는 내가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좀 나아졌나 싶다가 더 심해졌는가 싶어, 것도 더는 눈여겨보지 않기로 하였다. 쫄리면 쫄리는 대로, 속이 볶여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이면 또 그리 받아들이면서. 스스로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기로 하였다. 남들이 뭐라 하든, 겨우 아이 셋을 두고 그러는가 이해하려 들 거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울며 애곡하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로 알게 하시려는 것이라면.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겔 2:8-9).” 그 책에 무엇이 쓰였던가.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10).” 나는 아직 인지능력이 떨어져서 그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교회에 어떤 트라우마가 생겨 안 가게 됐다는 6학년 아이와 그게 무슨 소린지 가늠할 수 없어 낄낄 깔깔 웃어대는 4학년 여자아이들과 알고 보니 그 부모들도 ‘예전에는’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란 과거형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어찌 나의 영혼이 평안할 수 있겠나.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다 그러하지 않던가.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하는 중1 아이와 그래서 오락만 하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중3 아이. 이제 막 남자아이가 좋아져서 집을 나갔으면 좋겠다는 중2 여자아이와 뭔가 낌새를 차렸는지 무턱대고 조이며 감시만 하는 아이엄마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저 아골 골짜기에 우리를 두신 게 아닌가.
거기서 희희낙락 그 속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니겠나. 펴보니 그 안팎에 구구절절 우여곡절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사연들이 기록되었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 먹으라.” 아, 오늘 말씀이 내가 볶이는 이유를 알게 하신다. 애들이 나를 막 대하듯 편하게 구는 걸 보고 아내는 놀라워했다. 나도 쟤들이 왜 나를 편하게 여기는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살가운 사람도 아니고 같이 놀아주는 그런 위인도 못 되는데. 옆에 앉아 낄낄 깔깔 툴툴거리는 게 마냥 신기할 정도였다.
한 아이는 엄마의 외모에 민감하다. 사연은 모르겠으나 약간 기형적으로 무섭게 생긴 엄마얼굴을 한 번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엄마가 병적으로 두 오빠만 감싸고돈다. 그나마 아빠가 딸애 편을 들어주는 식인데 본의 아니게 너무 바쁘고,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는 부러 더 거칠고 억세게 굴며 감정조절이 잘 안 된다. 한 아이는 너무 되바라져 그 애 앞에서는 가끔 아찔아찔하다. 표현이나 속내가 ‘나가요 여성’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애가 결코 애가 아니다. 잠깐 나가서 입술에 뭘 바르고 왔는데 그게 이빨에 번져 우스우면서도 슬펐다.
아이가 아이다울 수 없는 세상이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세상인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아니면 누가 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줄까. 눈물이 흐르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비로소 그러한 날이 이르기까지, 그 감격에 함께 동참하는 일이란 지금 우리가 애곡하는 일이다. 안 믿는 가정에서 무방비상태로 세상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주를 찾는 데 있어 그 마음이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내 속의 주의 영은 그게 부대끼시는가. 내 몸이 볶이는 까닭을 나는 그리 이해하였다. 태연한 척 실제 아이들일 뿐인데, 것도 다 안다고 여기는 세 아이가 고작인데 그 구구한 사연을 두고 속이 아무렇지도 않겠나.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라.
먹으라. 그 속이 볶여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영혼은 애통한 것이었다. 한참 후 뒷정리를 하고 느지막이 집으로 올라가는데 그 아이들이 여전히 길가를 배회하며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순간 나는 창문을 열고 아이 이름을 크게 불렀고, 아내와 딸애는 영문을 몰라 화들짝 놀라고, 맞은 편 길 가던 사람들도 누가 누굴 부르는가 하여 두리번거리는 걸 뒤로 하고 집으로 왔다. 하나님은 자꾸 불가능한 일을 하신다. 누가 머릴 그렇게 예쁘게 묶어주었니? 예배 전에 나는 물었다. 엄마. 아이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그래? 다음엔 엄마랑 같이 와야겠다. 나도 말해놓고 그게 뭔 소린가 하여 화들짝 놀랐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나도 잘 모르겠다.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내 안의 내가 이처럼 복잡하다. 한 사안을 두고 여러 개의 마음이 뒤엉긴다. 거기에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선이 모이고, 그만큼 또 저들 마음도 분해되어 생각이 여러 개, 그 마음이 수 천 개로 불어난다. 정말 그 아이가 엄마와 함께 예배에 나오는 것을 상상하였다. 슬그머니 나가서 어설프게 바른 빨간 입술이 앞니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는 걸 아이는 알지 못했고, 나는 그게 웃을 수 없이 슬펐고, 울 수 없이 웃겼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나는 주님의 말씀에 울먹거리며 눈물이 핑, 돈다. 도대체 내가 뭘 하겠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생각은 많아지고 마음은 복잡해지는 것 같지만 길은 뚜렷하게 하나로 모아진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이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0) | 2017.10.25 |
---|---|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 (0) | 2017.10.24 |
주께 나오는도다 (0) | 2017.10.22 |
나는 기도할 뿐이라 (0) | 2017.10.21 |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0) | 2017.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