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에스겔 3:14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시편 112:5
햇살은 고운데 바람이 차가웠다. 여느 날과 같이 글방에 올라갔다. 창에 가득 듣는 햇살이 따뜻했다. 화초에 물을 주고 아침에 적은 묵상 글을 다시 읽었다. 어디에 가고 싶은 마음이 조바심쳤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가 저수지로 나갔다. 모처럼 낚시를 할 거였는데 물 위로는 바람이 드셌다. 물끄러미 물가에 서 있다가 도로 들어왔다.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천천히 걸어서 다시 글방으로 갔다. 가장 마음이 편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면서도 강권하심에 이끌려 사는 삶이 되었다. 때론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가 택한 일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그러니 가자, 하셨으면 좀 괜찮았어야지.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눅 8:22).” 일부러 그러신다. 들어앉아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심통이 나기도 하면서. 점심나절 사장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같이 일을 하는가. 오후께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어머니가 깍듯이 인사를 건네며 건강하시라 하는 것이다. 나는 레몬청을 두 잔 끓여다드렸다. 가볍게 뇌경색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소 어눌하여.
마음이 쓰이면 적어두고 생각나는 대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진다. 안 그럼 또 금세 까먹기도 하고. 보란 듯 아이 하나가 새로 왔는데 또 이런저런 사연이 구구하다. 참 희한한 게 어려운 아이 뒤엔 영락없이 문제적인 부모가 있다. 아이에게 지나치다 싶은 애착관계면 열에 아홉은 그 엄마가 교회를 다녔다. 믿는 집 아이와 안 믿는 집 아이를 구분 지을 건 없지만 그 확연한 차이가 집착의 정도였다. 믿는다는 사람이 더한 것이다. 왜 그럴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린 그 이유를 살폈다.
나는 다음 말씀 앞에 앉았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좋은 처지의 사람이라면 나름의 신앙으로 족하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
우리에게 맡기시는 아이들을 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하시려고, 주의 마음만 붙들게 하시려고, 호수 저편으로 가자하시고는 광풍을 일게도 하시는구나. 여덟 시에 아내가 교회로 나와 우린 같이 성경을 읽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어린 것이 뭐 그리도 눈치가 빠르고, 그 가운데서 살아남을 궁리를 하듯 약삭빠르거나 음흉하거나 거짓말을 도모하는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마저 다 읽고 마음이 음울해졌다. 하나님 없는 삶이 어떠한가, 싶은.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겔 3:14).” 우린 이제 일에 주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돈 버는 일, 어떤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 등 교회도 일로 여기면 오산이다. 그렇구나. 관계다. 주님은 내게 바른 관계를 이뤄가게 하신다. 나는 일 때문에 근심하고 분한 마음인데, 주의 권능의 힘은 나를 감동시켜 '우리'의 관계를 바로 하게 하신다.
주님과 나의 관계다. 나와 아내의 관계가, 아이와 나의 관계가 주님과 우리의 관계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노트에 적어두고 오래 밑줄을 그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 이내 내 것을 고집하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듣다보면 어쩐지, 싶은 무언가 막힌 담이 있었다. 그걸 하나님 없이 혼자 알아서 하겠다고 굴면 굴수록 그 생활은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나름의 모색이 병적인 단계에 이르게 되고, 기어이 곪거나 썩어 도려내거나 버려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있던 나를 오늘에 두심이 강권하심이었고 광풍이 일든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든 주님이 내 안에 계시었다. 죽겠다고 아우성치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복이었다.
처음엔 다 자길 위해 기도하는 것이겠지. 마치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가면서 하나님과 싸우고, 자기 서원으로 자기만을 위한 기도를 하였던 것처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아내가 아이 일기장을 좀 봐달라고 식탁에 올려놓았다. 철자법이 엉망이었으나 그 내용은 뚜렷했다. 물감 놀이를 하기로 해서 준비해갔는데 선생님은 무슨 일정 때문인지 다음 날로 미뤘다. 선생님의 거짓말 때문에 아이는 짜증이 났고 그래서 엄마한테 성질을 부렸다. 글을 쓰면서 그게 미안했던가보다. ‘그래도 내가 엄마 사랑하는 거 알지?’ 하는 아이의 말투에서 아이엄마의 말버릇이 어떤지 알겠다.
하나님 앞에서 싸워야지 하나님과 싸워서야 쓰겠나. 야곱의 기도가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한 것이었을 때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저를 이스라엘로 세우시고 여수룬이 되게 하기까지, 그 오랜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였다. 그렇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 그 마음으로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 그러라고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상황과 여건을 통해 하나님과 나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가 온전하여지기를.
곧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 112:5).” 내 의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내가 선하니까 의로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설프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야곱은 피곤하다. 자신만이 아니라 그 주변 모두에게 말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다는 건, 불구자로 사는 일이었다. 자기중심을 주께만 의뢰하게 하시려고,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어찌 저런 사람에게 꿈을 주시는가 하였더니,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 함을 알게 하시려고.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성도로 사는 온전한 삶이란 내 의지나 내 목적이 아니라 주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었다. 그것이 때론 우리의 삶을 장애로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 해도, 오늘의 온전치 못함이 영생을 꿈꾸게 하였다.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신다.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겔 3:14).” 내 아집이 다 깨지는 날까지. 나의 필요와 아쉬움과 욕망이 다 주 앞에 승화되는 그 날까지. 주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실 것을. 그렇구나. 내 안에 갈등이 있다는 건 내 주장을 여전히 굽힐 수 없어서였다.
하나님의 생각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나는 갈등하는 거였다. 주를 모시고 사는 일은 내 주장을 죽이는 일이다. 나를 변명하지 않는 일이고, 공연한 핑계로 하나님의 의중을 헤치지 않는 것이다. 곧 성령을 거스르지 않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내 생각, 내 의지, 내 꿈이 다 죽어지는 날까지.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 112:5).” 우리가 아이를 대하는 일에서, 곁에 두시는 한 사람을 바로 대하는 일에서, 내가 받은 은혜로 저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기를. 그럼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6).” 그럼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7).” 그럼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8).”
곧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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