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전봉석 2017. 10. 26. 07:15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 5:7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5-8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씀이 새롭게 읽혔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몸의 부활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겠으나 천국을 누리며 쉼을 얻는 맛은 생활 곳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대로 좋아도 되나 싶게 세상은 요란하게 굴지만 그게 어제오늘의 일이었던가. 한데 주의 사람이 더 요란을 떤다면, 오늘 본문은 그 일을 두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겔 5:7).” 전엔 미처 몰랐는데, 좀 이상하다 싶게 조바심을 내고 요란을 떠는 경우를 보면 영락없이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다. 분에 넘치게 아이를 학원으로 돌리고, 두각을 나타내길 바라고, 그와 같은 안달복달이 자신의 영혼은 물론 아이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

 

우리의 요란함이 둘러싸고 있는 안 믿는 자들보다 더할 때, 당연히 말씀을 등한시하게 돼 있다. 말씀의 위로가 묘연하다. 약속이 안중에 없다.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요란함이 오히려 안 믿는 이들의 규례 정도도 이행하지 못한다. 그런 이가 또 교회엔 열심이라.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리며 청소를 하고 무슨 일에 다 나서면서 정작 그 영혼은 골골하다 원망만 쌓여가는 것이다. 저의 천국은 얼마나 피곤한가.

 

우리가 단순하다는 건 모든 일의 의도가 하나님으로 일정한 것이다. 우리가 순수하다는 건 하나님으로 그 바라는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전폭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라고 그러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놓아두신다. 우리는 말 그대로 우리 생각의 결과를 끌어안고 사는 것이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렘 6:19).” 그래놓고는 하나님 타령을 하며 원망을 일삼는 것이다.

 

연달아 그와 같은 경우를 마주하게 하심으로 알았다. 친구 조카는 어찌 됐는가, 그래서 판결이 났는지 여전히 구치소에 있는지. 요가를 운운하며 아무렇지 않게 굴어 뭐라 했더니 친구는 다음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 오빠가 그 모양이다. 하늘을 향해 어찌나 욕지거리를 해대는지 원망을 입에 달고 산다. 엊그제 상담을 왔다는 아이엄마가 그 타령이었다. 교회에 열심은 다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요란하여서 자기 열심을 믿음의 정도로 아는가, 그렇게 애를 들들 볶아댔다. 아이 입에서 죽고 싶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나, 중1 녀석은 아빠가 어디 가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소릴 해대지 않나.

 

생각의 결과라. 이를 어쩔 것인가.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5-8).” 두려움을 잃어버린 세대다. 안 믿는 자들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는 것이고, 저들보다 믿는다는 이의 삶이 더 요란해서야. 정작 그 정도의 자연스러움도 잃어버린 것이지 않나.

 

새로 아이가 글방으로 왔다. 한 번 가보고요, 하는 단서를 달았다지만 싫은 내색은 아니었다. 어린 것이 뭐 그리 생각이 많은지 너무 조심하고 너무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안쓰러웠다. 5학년 아이가 같이 했으면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다른 요일 날 아이만 원하면 그리하자고 시간을 만들었다. 그 부모는 일에 치여 세 자녀를 돌볼 기력이 없고, 5학년 사내 녀석이 기가 죽어 그렇게 눈치를 본다. 내심 그게 뭔가 싶어서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열에 아홉은 그 부모 중 하나가 교회를 다녔었다거나 떠난 경우다. 신기하지?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우린 늘 아이들이 곁에 있어서 그런가, 그 고생이 고스란히 아이들 몫이다. 아파트에 장이 섰다. 일 년에 두 번 바자회라는 명목으로 부녀회에서 끌어들이는 장터다. 왁자한 먹을거리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천 원짜리 물건들을 판다. 모형 놀이기구도 있어 트럭 위에 관람열차가 있고 한편엔 바이킹도 있다. 동네 아이들이 개떼처럼 몰려다니고 부모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술추렴이 벌어진다. 자정이 다 되어서 파장을 했다.

 

요지경이라. 이미 아이들도 빤히 다 아는 걸 엄마들은 돌아앉아 담배를 핀다. 불콰해진 얼굴로 아이 이름을 목청껏 불러대지만 아이들은 자정이 다 되도록 몰려다니며 낄낄 깔깔 야단법석이다. 이틀째인가, 어제는 어쩌다 열 시가 다 돼 집에 들어오면서 아이들 둘을 마주쳤다. 그만 집에 들어가, 하는 나의 말이 노인네 같았다. 저쪽 구석 후미진 곳으로 닭꼬치를 몇 줄 사들고 뛰어갔다. 아무래도 상가건물이라 그렇겠지만 글방이 들어 있는 건물은 밤마다 요지경이다. 층마다 노래방에 오락실에 주점에, 날마다 축제다.

 

그러니 이 요란함을 어쩌면 좋을까?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믿는다는 자들의 안달이 더하고 복달이 더하니, 주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더 치졸하고 더 옹졸하게, 더 무례하고 더 무엄하게, 하나님 괄시하기를 모르는 자들보다 더하다. 그래놓고는 쩍하면 하나님께 원망이다. 서로 연결이 되어 소문이 났는지, 새로 소개로 온 이가 우리가 목사요, 사모라는 말에 할 말이 더 많아지곤 하는 것이다. 아침에 여호수아서를 마저 읽다 임종을 앞둔 여호수아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울렸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어쩌겠나. 같이 가자,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휘저어내는 걸.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나님 없이 사는 데 익숙해진 삶은 다시 돌아서기가 쉽지 않다. 아주 깨져 망가지기 전엔 어림없다. 더 무서운 건 그래도 한사코 외면하는 일이다.

 

별 수 있나. 아내와 나의 기도제목은 아이들이다. 맡기신 아이들을 위해 부디 저 아이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 영혼이 불씨가 되어 그 가정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너무 먼 데까지는 모르겠고, 오늘 택하라. 우린 주의 마음을 주시길, 그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분명한 건 우리다. 의도는 단순하게 감정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기를. 처한 우리의 상황이 우리들로 하여금 오히려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 시선이 고정되면 그 영혼은 건강하여서 마주하는 모든 사건 사고가 거울이 된다. 저들의 혼잡하고 부질없는 사연 하나하나도 거룩한 잠언이 된다. 주가 내게 두시는 말씀이 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아, 적성에 안 맞아! 아내는 푸념처럼 투덜거린다. 누가 눈물을 흘리며 자기 앞에서 하소연을 하는 꼴을 싫어한다. 청승 떠는 걸 싫어하고 축축 처지는 걸 아주 싫어한다. 활기차게, 씩씩하게,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런 성격인데 언제부턴가 아이가 죽고 싶다느니, 집 나갔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속엣 얘길 하는 사람이 되었고, 얼마 전부터 아이엄마가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다 퍽, 하고 울기도 하고 끝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는 게 아닌가. 그러게. 적성에 안 맞게. 하나님은 참 고약하시다. 싫은 것만 시키신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그게 나였구나. 나를 닮았구나. 저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래 맞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로할 줄도 안다. 가장 평안한 사람은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이었다. 남을 의심하지 않고 저의 어려움을 뭐라 나무라지 않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우리 마음이 평안할 때 학식이 많은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남에게 이로울 수 있다. 적성에 안 맞아! 하는 아내의 투덜거림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다. 그러면서 더욱 주를 바라는 단순한 믿음을 갖게 된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말씀만 붙들고 가자. 우리더러 아이를 구원하라는 게 아니시다.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줄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주의 마음을 대하자. 그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아이는 또 얼마나 닳고 닳았는지 어떤 아이는 눈치가 백단이다. 쓰는 용어나 멀리 굴리는 게 간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유심히 보면 그게 나였다. 저가 거울이었다. 좀 보라고 우리 앞에 두셨다.

 

어쩔 것인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에라, 모르겠다. 주만 보고 하자. 아이를 사랑하되 연연해할 건 없다. 또 그러다 말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우린 다만 우리 앞에 두시는 동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말씀 앞에 순종할 뿐이다. 아이 다섯이 한꺼번에 왔다가 가는 날에는 정말이지 혼이 쏙 빠지는 것 같다. 그런데 또 그때마다 지혜를 더하시고, 어느 아이에게 마음을 두게 하시고, 그러라고 기도하게 하시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나님은 두신다.

 

저는 누구신가.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