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전봉석 2017. 11. 2. 07:12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12:28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시편 119:75

 

 

 

그래도 인사는 올까. 빌려간 책이라도 돌려주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이라도 한 마디 해줄까. 언제나 미련은 개흙에 박힌 장화처럼 난감하다. 그래도 여태 마음을 쓴다고 썼는데. 했던 말들이 있고 같이 했던 시간이 있는데. 그럼 그건 다 뭐란 말인가. 애가 힘들어해서 그만두겠대. 것도 아이엄마가 삐쭉 전화로 전한 게 전부였다. 아이니까 그러려니 하다, 사람 관계 다 그렇지 싶다, 번번이 나는 휘둘리듯 서운하여 서러워하는 나의 마음이 되레 난감하였다. 그렇게 아이는 증발하였다. 먼저 전화를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그냥 두었다.

 

처음 만날 땐 애가 순박하여 갓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 같더니. 남자 아이가 생기고 그 무리와 어울려 다니면서 단짝 친구로 지내던 아이와도 소원해졌고. 아이 말에 의하면 걔가 말투도 그렇고 행동거지도 그렇고 이상해졌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가 오히려 자신만 그 무리에서 이상한 아이가 되었다고 같이 하던 아이가 울상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이엄마는 전혀 눈치도 못 채고, 뭐라 하면 우리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라고 펄쩍 뛰니까. 아내도 난감한 노릇이다. 서운하기는 그 마음이 더하겠다.

 

때 되면 라면도 끓여줘. 무엇이든 두었다가 그 앨 그렇게 챙기면서 안쓰러워 마음을 더 기울이고는 하였는데. 또 하나의 교훈이라. 거기까지다. 뭐라 할 거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새로운 아이가 들어왔다. 우리 일은 스치듯 지나는 동안, 있을 때 잘하는 거겠다. 부디 주의 마음으로. 그럴 수 있기를. 나는 사실 그러지 못해 쩔쩔매는 것이다. 정말 이런 상황이 너무 싫다. 정들면 지옥이라. 정주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바라지 말자. 그런데 그게 되나.

 

이 또한 자기만족의 부유물일 건데. 내 것에 대한 미련일 테고, 그래도 내가 어떻게 했는데 싶은 서러움이고 억울함일진대. 헛되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일찍이 성경은 이를 가르쳐 명심하게 하셨다. 그래 맞다. 나에 대해 내가 혹시나 하는 미련을 두지 말자. 자신에 대한 확신도 또는 실망도 모두가 부질없다. 행여 나의 이 마음이 그릇된 자리에 있는 겸손은 아닐는지.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17).” 그렇구나. 하나님만 바라게 하시려고, 저 아이를 사랑하되, 사랑하시는 주를 바라봐야지 아이를 바라봐서는 또 이처럼 낭패로구나. 그래서 날 믿으면 안 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고도 지나치게 악인이 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였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6-17).”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오로지 한 곳을 향해 비춘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말이다. 투덜거리듯 마음이 소란할 때 광주에 내려가 있는 녀석이 모처럼 안부 전화를 하였다. 여전히 안정제를 복용하였고, 학사경고를 받을 정도로 학업에 전념하지도 않았으며,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나 성실함에도 여전히 엉망이었다. 매를 더 맞아야 할 것인가.

 

그래, 그렇듯 버티다 정신이 번쩍 드는 날이 오겠지. 혹시 아니 두들겨 맞고 신학을 하고 목사가 돼야 할 일인지도. 나는 싱거운 소릴 하듯 혀를 끌끌 차며 아이의 무심함에 토를 달았다. 어쩌겠나. 주의 징계가 그 심판이 더디다, 아예 없다 하는 데는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 말씀에서 그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2:28).”

 

이어서 묵상하는 시편의 말씀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시 119:75).” 괴롭게 하심으로 비로소 나의 아집이 또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주장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그렇구나. 고난당하기를 빌기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기어이 그래야 한다면, 부디 그러는 날 동안 주가 함께 하시기를.

 

이제 나는 확신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어려워야 기도하고 힘들어야 말씀을 붙든다. 나만 그런가. 나야말로 별 수 없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92).” 말씀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결코 내가 나의 고통을 즐거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래서 그 유익이 말씀을 사모하게 하였다는 것.

 

다 늦어서 장모가 오셨다. 보행기에 몸을 의지하고 뒤뚱거리면서도 바리바리 뭘 그리 잔뜩 싣고 왔다. 딸애가 퇴근해 오는 시간이었고 아내가 서둘러 달려왔다. 11월 후원헌금도 내야 한다며 무거운 노구를 책상에 기울여 족히 30분은 넘겨 기도 내용을 봉투에 적었다. 젊은 날, 보다 일찍 주께 돌아와 그 마음에 평안을 얻으셨더라면…. 늘 나는 그런 게 먼저 마음이 밟혀 안타깝다. 평생을 우상단지 들고 동동거리느라 몸을 다 혹사한 뒤 늙고 병들어 주의 은혜가 사무치도록 감사에 겨워하게 되었으니.

 

부디 내 곁에 두시는 우리 아이들이 그 찬란하고 복된 나이에 주의 부르심에 응할 수 있기를. 너무 잘사는 것도 교만이라. 공부 잘하고 재능이 뛰어난 것도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만족이라.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그러니 어쩔 것인가. 아직도 살만한가보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나는 이제야 조금 알겠다. 잃은 뒤에 얻는다. 버린 뒤에 쥔다. 참 허탈한 일이겠으나 기어이 돼지우리까지 떨어져 쥐엄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워봐야 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그렇지. 끝내 그러기까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젊음을 다 탕진하고 난 뒤에야, 건강할 땐 미처 몰랐던 주의 은혜로 사무치게 자신을 돌아보며 그 은혜가 더 진하고 크겠거니.

 

오전에는 요즘 사사기를 읽고 있는데 참 징글징글하다. 타락하고 죄악이 창대해 주의 진노로 주변국의 압제가 따르고 그제야 주를 찾고 부르짖어 주께서 다시 주의 사람을 세우시고 돌이켜 주 앞에 온전하여졌나, 싶으면 또 영락없이 타락과 징계와 용서가 되풀이 되는. 악순환인지 은혜의 고리인지. 나는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어리석은 우리의 고집을 그 완악함에 치를 떨었다. 그게 나였어서. 나여서. 이내 곁에 두시는 저 아이들이어서. 예닐곱 줄 기도 내용을 적는데 그처럼 공들여 읽고 또 읽고 더디기만 한 장모의 모습이 경이롭기도 하였다.

 

처음엔 시간을 못 내서, 그렇듯 물질이 자녀가 성취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상이 목표가 꿈이 사랑이 더 큰 거여서, 자기만족에 겨워하다 끝내 최종적 교만이 무신론자가 되는 거였구나.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스스로 자신에게 일러 그리 두둔하고 또 다짐하듯 설득하는 것이 죄악이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문득 생각나는 게 아이가 처음 왔을 때, 그 순수함에 우리가 같이 교회 생활을 했으면 하였는데….

 

아이아빠는 무슨 이유에선지 교회만은 안 돼! 하고 일거에 엄포를 놓았고 아이는 더 이상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 되어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것이었구나. 퍼즐조각이 맞아 떨어지듯 아이의 곁길은 예정된 것이었다. 부모의 죄가 크다. 그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자기만 망치는 게 아니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설마, 하는 것이다. 더디다, 싶은 것이다. 그럴 리 없다, 여기는 것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5-16).” 그러느니 당장의 수고와 애씀을, 자신의 성실함을 믿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성경은 그 예언의 말씀을 경고를 쉼 없이 전하고 있는 거였다. 돌이킬 수 있을 때 끝내 돌이키지 않는 것이 죄였다. 다 망가지고 늙어 비로소 주 앞에 돌아올 수 있던 것으로도 복이겠으나.

 

나는 뚱딴지같이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전화 저편의 녀석에게 뭐라 나무라듯 정신 차려라. 정신 차리자. 같은 말만 되풀이하였다. 어쩌겠나.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시 33:16-17).” 그걸 아는 덴 다 잃고 패하고 망가져야 알 일이라면.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18-19).”

 

초딩 4학년 아이들 다섯을 놓고 수업하면서, ‘왜 꼭 글방이어야 하나?’ 하는 엉뚱한 주제로 글을 써보게 하였다. 누구는 노련하게 선생을 칭찬하고, 누군 장난스럽게 재미있다고만 하고, 누구는 짓궂게 엄마가 하래니까 한다고 답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달라진 점이 뭐가 있나?’ 하는 질문을 다음으로 던졌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 읽기가 늘었다느니, 글 쓰는 게 재밌어졌다느니, 국어성적이 올랐다느니. 한데 한 녀석이 자신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기다릴 줄 알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졌다고 썼다. 그거 참.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넉넉하시다. 이를 더디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하는 방종의 기회로 삼지 않기를.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19:76-77).” 하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88).”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9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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