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전봉석 2017. 11. 4. 07:15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에스겔 14:3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 120:1-2

 

 

 

우상은 내가 위로를 삼는 모든 것이겠다. 이를 마음에 두면 그것으로 걸림돌이 된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읽힌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고 산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마땅히 여기는 일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러므로 근심은 은근한 불신앙이다. 미래에 대해 장담할 수 없으니까 생겨나는 게 근심이라면, 이를 주께 맡기지 못하는 정도가 근심과 걱정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다른 무엇, 그 위로의 대상을 찾는 것이고.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겔 14:3).” 자식이, 남편이, 가족이 혹은 돈이 우리의 신앙을 흐려놓곤 하는 것이다. 이에 절묘한 말씀이 이어진다.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3-14).”

 

당대에 가장 의인들이라 할 성경의 주요인물 세 사람을 꼽으라면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아니겠나. 한데 주의 진노 앞에 저들이 누굴 건질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공의로 자신들만 건질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또는 어디 낙후된 지역과 그 주민을 위해 선봉에 서서 선을 도모한다 한들 나의 의와 공의로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그와 같은 선행이 또는 위로가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는 일이 될 수 있다.

 

이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증거 하여 전적으로 ‘믿는 자를 의탁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었다. 수치심을 순화해서 표현하면 부끄러움이다. 심화된 표현은 자기 비하나 열등의식이다. 살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에도 자연스럽게 부끄러움이 따르게 된다. 가령 내 친한 친구는 내가 목사가 되고, 이러고 있는 것에 대해 무위도식하는 것으로 여겨 자못 혀를 끌끌 차곤 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저의 열심히 사는 삶의 태도가 내 안에서 나를 부끄럽게도 하는 것이다.

 

수치심이란 감정의 역기능으로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느끼는 감정일 때도 있다. 가령 죄책감 때문에 혹은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나만 다른 부적합함을 지니고 있을 때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이 자체는 나쁘다 좋다, 하는 의미로 파악될 수 없다. 그것으로 이는 다음 단계의 방어기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문제다. 생겨나는 수치심은 정당하다. 인식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며칠 전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걸음걸이가 불안해서 들기 시작한 것인데 의외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 공연히 드는 수치심이다. 부끄러워서 슬그머니 지팡이를 그냥 들고 걷는다거나 또는 부러 더 의존하며 보란 듯이 구는 역기능의 감정도 느껴진다. 아! 하는 어떤 느낌. 내가 장애가 있었다는 걸 새삼 느끼는 것이다. 불편함도 익숙해지면 더는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부러 더 연민을 자아내려는 묘한 감정과 이를 의식하는 강한 부끄러움과 새삼 그 모든 게 감사할 따름이란 게 뒤섞여, 나의 생각하기는 때로 감정보다 빠르게 앞서간다.

 

아내가 조금 서운한 소릴 하면 돈을 못 번다고 무시하나, 싶은 열등의식으로 추락하게 하는 수치심은 온당치 못하다. 말 그대로 혼자 무위도식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를 변명하기 위해 아주 강한 수치심이 발동하여 혈기를 내거나 침묵 속으로 빠져들거나, 차가운 몰인정을 자처하거나 냉소적으로 상대를 먼저 헐뜯는 자리에도 이른다. 당연히 옳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럼 이를 심리학적으로 잘 극복하여 그것을 능동적인 감정으로 전환시켜야 하느냐? 그런 말이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 그리 애쓰는 것 자체가 또 우상이 된다는 소리다.

 

수치심은 나를 변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드는 감정의 방어기제다. 순식간에 일어난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어떤 행위를 모색하거나 옷차림을 정갈하게 하여 남에게 흠 잡히려 하지 않는 모든 애씀도 다 우상이다. 행동거지 똑바로 해라, 옷차림을 단정하게 해라, 음식을 먹을 때 쩝쩝거리고 먹지 마라, 하는 식의 교육이 은연중에 우리의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도 그런 경우를 자주 겪으셨다. 먹기를 탐하는 자로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성전을 파괴하는 자라고 비난을 들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 14:58).”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라고 여겨졌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눅 23:35).”

 

굳이 그런 비난이나 원성에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칭찬은 물론 비난에도 꿈쩍 않으실 수 있었던 건, 그 중심에 하나님으로 온전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뭐라 강변하였나.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교회를 두고 목사에 대하여 뭐라 일삼는 저들의 말은 마땅하다. 저들에겐 복음처럼 한심한 게 없을 테니까. 자신의 힘과 의지로 서지 않고 주를 의지하려는 유약한 자들의 변명으로 들릴 테니까.

 

이를 의식하여 어찌 행동으로 취하려는 것 자체가 모두 우상이었구나. 새삼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내가 남을 많이도 의식하며 살았구나, 하는. 혼자 글방에 있으면서도 수시로 드나드는 이들에게,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내가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지. 그 차이가 크다면 이는 위선이고 가장된 경건이다. 누가 있으나 없으나, 어떤 모습이거나 말이거나,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 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게 아니라, 이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확신케 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내가 의탁한 것, 내 몸이나 자식이나 일이나 미래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하여. 그러므로 근심은 은근한 불신앙으로 의탁할 수 없어하는 내 안의 미숙한 믿음의 정도이지 않겠나. 이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며 반응하여 정신과적 약물을 의존하는 나의 경우는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는 경우이고. 그만큼 유약한 사람이라.

 

그것으로 나는 주를 바란다. 부디 나의 연민으로 빠져들지 않게 하시기를. 남에 대한 반감으로 역기능의 수치심으로 작용하지 않게 하시기를. 어떤 식으로든 내가 나서서 무장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시 120:1-2).” 그럴 때 오히려 기도할 수 있다는 데 놀라운 은혜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복이 많다. 예민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게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

 

오후께 설교 원고를 출력하고 주보를 만들고 비로소 한 주를 다 끝낸 사람처럼 기진하여 소파에 누워 있었다. 한 아이가 전화를 했다. 모 기관에서 실시한 전국 청소년 문예공모에서 뽑혀 글이 실렸다고, 책자를 소포로 받고 좋아하였다. ‘이웃, 배려’라는 주제의 글이었던 것 같은데 그 목록에 수록된 걸 보니 기적처럼 우리가 보낸 네 명의 아이들 글이 책자에 실렸던 것이다. 안 썼거나 끝까지 엉터리로 다듬지도 않고 보낸 아이를 제외하고, 초등학교 한 명, 중학교 세 명이었으니 그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주님이 이렇게도 위로를 하시는구나.

 

당최 이런 애들을 데리고 뭘 하나 싶었는데, 아주 작고 사소한 데서 기쁨을 더하셨다. 이 또한 내 안에 우상을 들이는 일일까봐. 행여 나의 수고와 애씀을 나의 공적으로 여길까봐. 또는 나의 연약함을 수치로 느껴 강한 모멸감이나 열등의식에 빠질까봐. 하나님은 내게 늘 말씀을 두시고, 또한 이를 깊이 탐독하여 묵상한 이들을 책도 두신다.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겔 14:4).” 하나님 외의 모든 건 우상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5).” 오늘 아침, 말씀은 내 안의 우상이 여전하여서 내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자기연민에 사로잡히곤 하는지. 그걸 마치 훈장처럼 여겨 그래도 되는 것인 양 슬퍼하고 힘들어하는지. 그래도 되는 것으로 여기는지.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6).”

 

그만큼 나에게 시선을 둘 거 없다는 걸 알게 하신다.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하신다. 이 모두는 우상숭배라. 하나님 아닌 데 마음을 기울이는 모든 주관은 불신앙이라.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내 자식도 아내도 나로 하여금 득을 보게 할 수 있지 않다. 다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 모습이 저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이를 어찌 보고 어떻게 판단할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하물며 남들 시선 따위랴.

 

주만 바란다는 건 ‘내가 믿는 자를 알고 또한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은 주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일, 성경을 바르게 읽고 듣지 못하는 일,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하지 않는 일. 그로 인하여 자꾸 이는 내 안의 주도권싸움을 수치스러워해야 한다. 아! 하나님 앞에 오롯이 나만 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힘써 싸워야 하는 것이구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이었구나.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내 몸의 연약함도 그로 인해 파생하는 여러 끊을 수 없는 감정들도, 그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을 나는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날 동안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쓰고, 나의 생각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주께 고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내가 부끄러워하면 나를 그리 두고, 그리 여기시는 주님이 부끄러움을 당하시는 일이었겠다. 나에게 두신 수치심마저 온전히 주를 바라는 데 사용하도록 하시려고,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렇지. 그래야 하는 거였어. 결국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성전으로 오르는 첫 번째 디딤발이 되어주는 게 나의 환난이었어.

 

그러므로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2).” 나의 위선과 아집을,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3).” 나의 한탄과 서러움도, 그것 때문에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7).” 내 안을 드나드는 불신앙의 고리는 여전하였던 것이구나. 이내 무엇으로 이겨낼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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