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에스겔 20:49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싱거운 하루였다. 미지근하여 밍밍하기까지 한 날이었다. 조금 아팠고 조금 우울했으며 조금 심심했고 조금 괴로웠다. 나는 그 무게나 크기를 어찌 표현할 길이 없어, ‘조금’이라는 부사어를 더해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게. 가끔씩 밀려드는 우울감으로 나는 속수무책이다. 영혼을 갉아먹는 좀 같다. 나무에 달라붙어 야금야금 나무를 파먹는 나무굼벵이처럼 말이다. 전혀 대수로울 것 같지 않은데 어느새 가루좀은 내 영혼을 아작내고도 남겠다. 왜 그렇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밑도 끝도 없이 징징거리는 아이처럼 당혹스럽다.
딱 그 시점에 존 파이퍼의 일곱 번째 시리즈 <확신의 영웅들>이 도착하였다. 첫 인물은 찰스 스펄전이었다. 우선 그의 아내 수잔나 톰슨의 경우를 보자. 저보다 두 살 많고 후에 열한 살을 더 살고 죽었다. 결혼 후 열한 번째 되던 해에 쌍둥이를 낳고 병을 얻어 평생을 불구로 살았다. 스펄전은 25세에 통풍이 왔고 이어서 류머티즘 관절염에 신장염을 앓았다. 끝없는 논쟁에 시달렸고, 우울증과 싸워야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어린아이처럼 울곤 했다.’
칭얼거리던 마음이 머쓱하게 됐다. ‘조금’ 그런 걸 가지고 누구 앞에서 지금! 하고 하나님이 습, 혀를 차시는 것 같았다. 나에게 책 읽기란 참으로 시의적절하여서 마치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활자로 전달하시는 게 분명하다. 점심나절 잠깐 나가 산책이라도 할 겸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올까? 하던 한가한 마음이 쑥, 들어갔다. 저의 사역과 설교와 그 ‘성공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가운데서 저처럼 견뎌낼 수 있었을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오후 내내 스펄전의 이야기로 숨이 가빴다. 다소곳해져서 나는 얌전히 주를 바랐다. 뒤돌아보면 차마 생각조차 부끄럽고 민망했던 생이 아니었나. 그런 나를 두시고 오늘 이처럼 은혜에 은혜를 더하시는 데 ‘조금’ 그런 걸 가지고 이처럼 호들갑을 떨어서야.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다.’ 누구에겐 이런 얘기가 그저 무용담으로 들리고 누구에겐 다만 비유로 여겨질 테지만,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겔 20:49).”
이 모든 상황과 사건들은 사실이었고 나는 그와 같이 동시대를 산 것은 아니지만 저들의 족적이 오늘 나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여전하여서 그 경고의 말씀에 대하여, 또 꾸짖어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주의 마음은 한결같으심을 알겠다.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
더 말해봐야 무엇하겠나. 살아서 이내 삶으로 아는 삶이라면 살아봐야지. 살아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생생하니 느끼고 절감해야지. 별 수 있겠나. 때론 이만큼의 세월이 지나서야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쉬워 후회만이 밀려든다. 지난 날 나의 저렴했던 생각과 언어와 판단은 고스란히 오늘 날에도 여전하여서, 나의 감상은 또 느낌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하고, 거룩하고는 거리가 멀고, 경건의 모양조차 갖추지 못하고 사는 인생인데, 그런 나를 영광의 주를 선포하는 말씀 전하는 자로 세우셨으니 암담하기도 하다.
뭘 해도 미천할 따름인데, 행여 위선과 가증한 겉모양만 갖춰질 뿐인데, 나는 무엇으로 사람들 앞에 주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까? 종종 사람들이 나를 ‘목사님’으로 부를 때의 그 민망함과 초조함은 그래서이다. 수업하는 아이들 가운데 처음부터 목사님으로 소개 받고 온 아이들 셋은 꼬박꼬박 목사님, 하고 나를 부른다. 도대체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말로 또는 표정으로 경건을 나타내야 할까? 가끔 아내의 투박한 말투에서 경박함을 느끼다가 그게 결국은 나의 본바탕이었다는 데 화들짝 놀란다. ‘목사님’으로 여겨주는 게 오히려 황송할 따름이다.
빈둥거리듯 시들하여 마음은 끝 간 데 없이 추락하고 있을 때에 나는 '스펄전 이야기'에서 목사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 지긋지긋했을 삶을 마주하며 아찔하였다. 헐거웠던 나의 마음이 화들짝 놀라는 경험이었다. 아니 어떻게 한 사람을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어놓으실 수 있을까? 그런데 또 그가 그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니! 그것도 가시적으로 성공을. 가히 영웅이란 호칭을 들어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 나는 미련하여 저의 고통스러웠을 하루하루를 상상하다가 힘에 부쳤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 어찌 내 수고와 노력으로였던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앞에 그저 유구무언이라. 가령 이런 것이다. 문득 누가 생각났다. 저는 잘 지내나? 하고 저의 소속 단체를 검색하였다. 모 사단법인으로 두어 해 나 또한 실장이란 직함을 들고 근무한 데였다.
앞서 서너 해 전부터 내 명의를 그곳에 두어 저들의 이런저런 횡령과 자금포탈을 간접적으로 도운 셈이고, 이를 거짓 증언해주면서 졸지에 실장으로 들어가 ‘오전근무’만 하고 월급을 받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던 셈이다. 단단히 거드름을 떨며 살 때였다. 겁 없이 굴며 갈 데 못 갈 데 다 드나들던 시절이다. 승승장구하듯 이듬해엔 무슨 병원을 건립하여 운영할 계획이었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인 내게 맡기고 싶다고, 회장은 잔뜩 나를 추켜세운 때였다. 왜 갑자기 환멸이 밀려든 것일까?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게', 나는 무작정 사표를 내고 동해로 혼자 여행을 떠나면서 차 안에서 그렇게 펑펑 울었었다.
나름 잘나가던 때에 왜 저러나 싶어서 친구나 회장은 안절부절못했고 일반 사원들은 의아해 했다. 진짜 나도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른다. 너무 싫었다. 그러고 사는 게 싫었고, 그러고 사는 사람들이 싫었다. 특별히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고, 뭔가 틀어져 일이 꼬인 것도 아닌데. 어떤 모멸감이 나를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사직을 하고 그 이듬해에 글방을 낸 것이니까, 것도 참 묘한 일이다.
엊그제 문득 저들이 궁금해서 그들의 홈페이지를 열었다가 친구와 회장이 둘 다 고소당했고 구속되어서 다른 이가 대표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만두고 그 다음다음 해부터 회원들이 들고 일어났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선두에 서서 저들을 탄핵한 것이다. 그 명단에는 여전히 익숙한 이름 서넛이 앞줄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계속 거기에 있었더라면 나 역시 저들과 같이 엮여서 고소당했거나 구속되었을 게 분명하다. 혹시나 해서 내 이름을 검색했더니 아무런 정보도 뜨지 않았다. 구구절절 말로다 어찌 설명할까?
그런 내가 오늘의 나로 있는 게 어찌 은혜가 아니겠나?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나의 남은 생을 송두리째 그냥 다 드린다 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렇게 아무도 몰래 부끄러움을 감사로 느끼고 있을 때 존 웨슬리의 글을 하나 읽었다. 1883년 뉴욕 감리교 신문에 실린 글이었다. ‘가볍고 불필요한 방종을 피해야 한다.’는 것으로, ‘과식, 늦잠, 게으름, 자신의 몸에 대한 지나친 관심, 편하고 쉬운 삶, 노동을 부정하는 시각, 식욕 및 정욕을 충족시키려는 삶’을 모두 탈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크게 안도를 하며 다행이라 생각하였던 건 내가 충분히 그러고 살아서가 아니라, 그러고 살아야 한다는 데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먼저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데 따른 확신이고,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거류민이요 나그네일 뿐이라는 데 그러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와 같은 말씀을 증표로 삼아 지난 날 나를 돌아보며 주 앞에 한없이 송구스러워하다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말이다. 신기할 따름이다. 기껏 아프고 싱겁고 무력하여 우울감에 젖어들다가 앞서 걸은 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새삼 용기를 얻을 수 있다니. 저의 이야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금 내게 하시고 계신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그게 고맙고 놀라와 마음을 바로 하고 주를 온전히 바라기를 구하게 된다는 게. 이미 죽어 마땅한 사람을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에 동참하게 하셨으니, 나의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남은 생이나마 주 앞에 바르게 쓰일 수 있었으면 하는.
내 값이 엄청나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냥 거둬가셨어도 무방했을 목숨인데, 그 가치 없음에 대하여 이처럼 값어치 있게 이루어주시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내가 나를 알기 때문이다. 어떤 위인인지. 그리하여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그렇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구나. 그 값이 어마어마하게 지불되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부디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이제 내게 남은 모든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만이 나타나시기를. 여전하여서 또 불평과 원망이 일 때 하나님은 스펄전의 이야기를 가져다가 내 앞에 놓으시듯,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 오늘에 된 것이 은혜 아닌 게 무엇인가 돌이켜 알게 하신 하루였다.
고로 이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나의 남은 생이 주님으로만 온전하였으면. 주만 바라며 주만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2).” 곧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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