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17. 11. 7. 07:25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에스겔 17:24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7).” 주가 그리하신다. 곤고함이란 무엇 때문이든 어렵고 고생스러움을 말한다. 인디언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29세에 죽었다. 그의 가족력이 그러해서 부모도 젊을 때 죽었고, 형은 32세에 다른 형제는 23세에 누나는 34세에 죽었다. 낙심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불신앙으로 귀결되는 것이겠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이 말했다. 저는 24세 때부터 통풍으로 고통당하였다. 자신이 슬피 울면서 왜 그처럼 어린아이 같이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던 적도 있다.

 

신체적 고통으로 이는 우울감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안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우울감은 속수무책이다. 마음을 흐리게 하고 금세 절망감에 젖게 만든다. 영혼은 음울한 감옥에 가둬놓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왜 그러냐는 칼날을 뽑으면 나의 마음은 졸지에 난도질당한다. 말씀으로 위로를 찾는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그것으로 누리는 주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다른 이들은 어떠한가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늘 또 견딜만하여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127:2).” 가끔 아내는 나의 잠자는 걸 갖고 뭐라 한다. 종일 막노동을 하고 온 사람처럼 너무 깊이 곤하게 잠들기 때문이다. 앉기도 서기도 눕기도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서 배운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37:5).” 달리 손 쓸 방법이 없다.

 

낙심은 종종 별 수 없다. 어제는 괜히 그러했다. 자꾸 몸이 아픈데 어디가 왜 아픈지 모르겠고, 오후 내내 너무 조용히 혼자만 있어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우울하였다. 왜 그렇듯 그냥 놓아두시는지. 때론 하나님의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지난 주부터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려고 했으나, 새로 한 보조기에 걸려 더는 탈 수 없게 되었다. 길가에 묶어두고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때의 심정이라니.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공연히 화가 나는 일 같기도 하여. 그런데 또 그게 그럴 일인가. 새삼.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렇겠다. 나를 낮추시고 주를 높일 수 있게 하시려고. 딸애가 퇴근해오고 아내가 수업을 마치고 교회로 오면 우린 잠시 기도회를 갖는다. 하루가 또 안녕하였음을. 우리에게 두신 날에 주만 바라게 하심을. 그럴 때 이러저러 해서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가 절절함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나의 하루는 졸하다. 주변이 없고 생각이 좁아 그 생활이 미천할 따름이다. 나의 하루를 기술하라면, 졸하였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한 것이겠으나.

 

졸하다 앞에 어떤 접두사를 붙이느냐에 따라 하루가 달라진다. 옹졸하였거나, 너그럽지 못하고 좀스러움. 노졸하였거나, 나의 못남과 옹졸함을 드러냄. 잔졸하였거나, 연약하고 옹졸함. 아졸하였거나, 성품은 단아하나 융통성이 없음. 어졸하였거나, 말솜씨가 없음. 투박하고 미천하기만 한 나의 졸한 하루에 대하여 이처럼 날마다 글로 쓴다는 것도 때론 보통 일이 아니다. 아이들 말마따나 할 말이 없는 날들이다. 그처럼 졸하여 별 볼일 없는 나의 날들 가운데서 주를 바라는 마음이 그럼 어디에서 나오는가 했더니.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어려울 때. 어디가 무슨 일로 힘에 겨울 때. 비로소 나는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더란 말이지. 그렇다면 새삼 나의 졸한 것이 아름다운 축복이지 않은가.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하는 말씀을 마주하면 그릇을 두고 묵상하게 하시는구나, 싶다. 흙이 물을 만나 반죽으로 짓이겨질 때의 아찔함과 같이. 또는 서로 상극인 불과 물의 만남은 비로소 성령과 육신을 연상케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물은 지표 위에서 흐르고 불은 공기 가운데서 흐른다. 물은 흙을 떠남으로 더욱 단단하여지고, 그 자리를 불이 채움으로 토기의 응집력은 가히 더욱 단단하여진다. 나를 못 살게 구시려는 게 아니라 살게 하시려는 거였다. 단단해지게 하시려는, 그 과정은 그릇이 구워지는 가마 속처럼 아득하고 두렵다. 나는 결코 아픈 게 싫다.

 

이런 내용의 글도 싫고 그런 사람을 마주하는 일도 싫다. 부러 더 그리 분포해 두셨는가. 같은 복도를 쓰는 모 체험의료기장으로 육신이 불편한 노모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때론 안쓰러워 눈물겹다. 위로 두 층이 다 치매중증노인 요양병원이라 드나드는 가족들의 표정도 무겁다. 종종 나의 마음은 알싸하여서 고통이 이웃하는 알 수 없는 동질감이 아득하여 두렵다. 끝 모를 검은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마 저 안쪽의 암흑은 어느새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가득하겠다. 이런 생각들을 가만히 노트에 끄적거리다 힘에 부쳐 그만두었다.

 

뭐했어? 하고 누가 물으면 나의 하루는 그냥 졸하였다. 뭐 딱히 재주나 재능이 없는 미천한 하루였다. 나의 기도 절반 이상이 날 위한 것인 날은 어디가 자꾸 아픈 날이다. 칭얼대는 아이처럼. 그러다 오늘 아침과 같은 말씀 앞에 서면 문득 하던 생각을 멈추게 된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4).”

 

불은 물을 삼키면서 그 화력이 더욱 강하여지고 토기는 어느새 불덩어리가 되어 분간이 어렵다. 가마를 태우는 나무들이 안다. 주가 낮추시고 주가 높이시는 불과 물의 순환구조이다. 그리하여 그릇은 말을 더할 길이 없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가마는 이를 알게 하기까지 달구어져 어느새 가마 자체가 불구덩이다. 생각만으로도 무섭다.

 

내가 채울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그럼 무엇을 사랑해야 할까? 흙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막 4:1-20) 무엇이 나의 영혼을 질식시키는지 알게 하신다. 불이 아니다. 나를 눅눅히 적시고 있는 물이다. 탐욕이다. 마르지 않은 나의 성품은 축축하여서 성마르다. 도량이 좁고 느긋한 데가 없어,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 게 너무 많아서인가.

 

피할 수 없는 이 길은,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 119:36).” 말 그대로 지나친 마음이다. 이미 그러한 데 따른 수긍과 감사가 아니라 숱한 의문과 불만이 먼저 드나드는 일이어서 괴롭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루였다. 주가 아니시면 나는 어쩌나.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고통은 종종 거두절미하고 이를 내게 알게 하시려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시는 것 같다.

 

늘 우울감에 시달렸다는 앞선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할 때면 그와 같은 싸움이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자라는 내 안의 쓴 뿌리를 어쩌지 못해 싸우고 또 다투다 주 앞에 내어놓는 일. 그렇구나.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를 보상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불이 없이 물이 마르지 않고 물기가 마르지 않으면 토기는 단단하여지지 않는 이치와 같이 우리 앞에 놓인 가마는 두 개이었다. 하나는 십자가 다른 하나는 지옥이다. 십자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한 자의 것이고 지옥은 끝내 그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의 것이다. 두 가마의 불길이 타오른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나무가 불을 삼켜 똑같이 뜨거운 것 같은데 지나다보면 아무렇지도 않다. 모든 죄는 갚아지나니 십자가에서든지 지옥에서든지. 그렇겠구나.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몸을 꼼지락거리며 아픈 엉덩이를 뒤틀고 허리를 꺾어 곧추세우고 오른 팔을 요란히 움직이며 고달픈 것 같은데, 졸하나 절하다.

 

견줄 데 없이 뛰어난 어떤 만족감. 훨씬 넘어서는 어떤 충만함.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그렇구나. 이를 내게 오늘 알게 하시려고. 절하다 앞에 어떤 접두어를 붙이느냐에 달렸다. 적절하여 간절하며, 애절하여 수절하다. 졸하여 절한 나의 하루를 또 하루 내 앞에 두신다. 주여 내가 주께 눈을 들어 향하나이다. 그리하게 하시려고. 내 안의 간절함으로,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그리하여 적절하게,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3).” 때로는 어리둥절하겠으나,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 이로써 나는 엎드려 절하였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