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전봉석 2017. 11. 8. 07:17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에스겔 18:32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편 124:7-8

 

 

 

싸워야 한다는 말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날마다 나는 죽는다는 말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내 안에 이는 여러 정욕에 대하여,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

 

그렇구나.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세상이 두 쪽이 나는 일보다, 남북이 전쟁이 터져 3차 세계전쟁이 일어나는 일보다, 환경오염으로 오존층이 파괴되어 전 인류가 멸종하는 일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었으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정욕이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욕구다. 욕망으로써 무엇에 대한 간절함이다. 성적인 색욕과 돈이나 물건에 대한 물욕을 비롯하여 욕구한다는 것은 얻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씀 앞에서 한참을 머문 하루였다.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겠다. 그럼 그런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인데, 믿는 자가 그것으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1993년 7월 20일, 도널드 웨이맨은 펜실베니아 주 산림작업장에서 뒷마무리를 하다 벌목한 나무에 한 쪽 다리가 깔렸다. 소리 지르며 구조를 요청하느라 발버둥쳤지만 점점 날이 어두워져 더는 가망이 없게 되었다. 곧 산짐승에게 공격을 당할지, 급격히 떨어지는 저체온증으로 사망할지. 저는 점점 감각을 잃는 다리를 절단하기로 하였다. 주머니칼을 꺼내 신발 끈으로 종아리를 지혈할 수 있도록 끈으로 묶고 손수 자신의 근육과 뼈를 끊어내고 탈출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읽으며 성경의 다급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믿는 자가 나중에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느냐는 의문은 우문이었다. 믿는다는 그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나름의 희생과 헌신으로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신앙생활을 운운한다고 한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결국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내 안에 이는 온갖 정욕에 대하여 나는 수시로 환멸을 느낀다. 누가 내 속을 조금만 들춰본다면 금세 염증이 날 정도이다. 그렇구나. 정욕의 결과는 지구 종말의 재난보다 더 무서운 일이구나.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눅 12:46).” 설마, 했던 안일함이 나의 궁극적인 종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겠다. 믿음을 너무 안이하게 여기는 경향들이 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를 왜 그럼 하나님은 그토록 복잡하게 처리하셨겠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대신지지 않고 아들의 죄를 아버지가 대신지지 않는다.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2).” 그렇지 않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4).”

 

여전하여서 끝내 정욕에 사로잡힌다는 건 그의 안에 믿음이 헛것이었거나, 사냥꾼의 올무에 걸렸거나.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7-8).” 말씀 앞에 앉아 크게 안도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만한 일에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하는 의문 자체가 난센스였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 스스로 거룩을 풍미하였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내버려둔 자신의 행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단호한 말씀 앞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내 안에 이는 욕망을 묵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얼마나 수시로 드는지 모른다. 이 정도를 뭐? 하는 묵인이다. 설마, 하는 안일이다. 에이, 싶은 안이함이고. 그럼 뭐 한 사람도 천국에 못 가게? 하는 자기변명이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수두룩한 이와 같은 방심이 하나님 대신 아내를, 자식을, 나의 학식과 신념을, 보람과 의미를, 나름의 헌신과 희망을 내세우며 귀히 여겼던 것이겠구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아, 이를 이루어 행하며 사는 일에 있어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가.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좌절한다. 실망하고 낙심한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마음이 가난하여져서, 애통하고 온유하며, 긍휼하고, 의에 주리고 청결하며, 화평하여 주를 위해 박해도 받을 수 있는 것이겠구나. 오후께 아이가 오고, 아이는 역시 아이라는 생각을 하다 무릎을 탁, 쳤다. 너무 일찍 예의바르고 어른스러워서 얘를 어쩌면 좋은가 했더니 별 것도 아닌 일에 배시시 즐거워하며 웃는 걸 보고 알았다. 어른스러운 것과 어른은 다른 것이다. 아이다운 것과 아이는 다른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것과 어린아이는 다른 것이다.

 

주 앞에 내려놓는다는 말, 나는 그게 참 어렵던데 다들 너무 쉽게 하는 걸 보고 알았다. ~스러움과 ~다움은 시늉이지 본질이 아니다. 정작 그리 안 돼서, 할려고 해도 그게 그렇게 안 돼서. 그런 자가 주 앞에 서서 난처해하는 것이 산상수훈으로 주신 팔복의 비결이었다. 하나님 없이는 나는 그저 가난하다.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애통한다. 어떻게 하시든 주님 마음대로 하시라, 나는 온유하다. 남이 뭐라 해도 나는 긍휼하다. 화평을 구하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리 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어찌 내 정욕을 불살라 내어줄 수 있겠나. 그렇지 못한 나를, 날마다 죽노라. 바울 사도의 심정을 알겠다. 왜 그토록 자신을 쳐 복종하는지를. 예수님도 그와 같은 모습을 가감 없이 우리 앞에 보여주셨다. 그럴 때 예수님은 어찌하셨던가? 믿음의 동료를 함께 하셨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마 26:37).” 그리고 저들에게 마음을 여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8).” 기도를 부탁하셨다(38).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부으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9).” 아버지의 주권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셨다(39). 그리고 십자가 너머 영광의 은혜에 시선을 두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존 파이퍼 목사의 <믿음으로 사는 즐거움>을 읽고 메모해두었다. 그렇지. 어둠 속에서 단념하지 않기.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그럴 수 있는 비결은 하나, 내 안의 욕망을 자꾸 주 앞에 내어드리는 일. 주님께 빚진 자처럼 면구스러워하며 주눅 드는 게 아니라, 더욱 더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는 내 모든 걸 자꾸 드러내어 그 염치없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아, 그게 심령이 가난한 일이구나. 애통하는 일이구나. 온유함이란 그런 것이겠구나. 살아 있는 동안에 바로 사는 날들이 중요하겠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죽음 너머의 생이었다는 것.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기어이 살리시려고 죽이시는 일이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 말씀 앞에 아멘, 하였다. 아이는 앞에 앉아 종합무술 1단 단증을 받았다며 ‘어린아이 같이’ 즐거워하였다. 이를 글로 써보게 하는 일은 덩달아서 즐거웠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시 124:1).”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곧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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