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에스겔 23:31-32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편 129:4
악이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모든 것이다. 그럴 수 있으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 사는 일이란 게 그런 것이겠으니, 이 땅에서의 모든 도모가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는 쪽으로 기운 듯하다. 가령 교회에 안 나오는 게 나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믿는 일이 믿지 않은 일보다 미련해 보인다. 오늘 본문은 그 수치를 알지 못하는 오홀리와 오홀리바에 관한 보고서다. 언니인 오홀리는 이스라엘이요, 동생 오홀리바는 유다다. 언니의 잘못을 목격하고 돌이키는 게 상책이었을 텐데 똑같이 그 길을 가니, 그에 따른 경고라.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서 누구를 떠올리다 문득 내게 두시는 두려움이 복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기껏 잘 지내다 덜컥, 병에 걸린 친구는 소경이 될 위기에 놓였고 이를 보고 나는 겁을 먹었다. 나름 합리적인 신앙으로 존경해마지않던 선생이 어느 순간부터 다원주의로 흘러 하나님을 복합적인 대상으로, 서로의 이상이 하나로 또는 동시에 여럿이라서 없음과 다를 게 없는 것이라 주장하자, 나는 겁을 먹었다. 비록 내 생활이 그릇되긴 했어도 유일하신 하나님께 대한 뚜렷한 신앙은 있었던가 보다.
그러나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겔 23:31-32).”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야 별 수 없다. 그러려니 하고 말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전 주에 나름 간곡한 어조로 이번 주일을 권하고 알렸는데, 큰 애는 연락도 없이 오지도 않았다. 선잠을 깨서 밤새 뒤척이며 그 아이 생각을 하다 애간장이 타는 줄 알았다. 문자라도 다시 해볼까, 통화라도 할까, 뭐라 말해야 하지?
한참 그럴 수 있는 나이에 더는 그러지 말라고 말한들 그게 어디 귀에 들어오겠나. 주께서 나를 이루시고 다루셨던 그 사랑을 신뢰하는 수밖에. 그냥 두자. 애끓는 심정으로 아이를 두고 기도나 하자. 자꾸 같은 말을 한들 오히려 더 그러려니 할 테니. 세월은 흘러 더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해도, 어느 지점에서 주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나에게도 함께 하셨던 것처럼 아이들과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다시 주어진 아이들에게나 전념하자. 을씨년스런 마음을 다독이며 그리 다짐하였다.
아이들 셋과 함께 추수감사 예배와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서로는 엄숙하였고 나름은 진지하였다. 아이 특유의 부산함이나 지루함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주의 인도하심만을 되뇌어 바라였다. 주가 더하시고 주가 끊으실 것을. 내가 애써 수고한다고 될 일이겠나. 다들 돌아가고 뒷정리를 하는데 마음 한 곳이 헛헛해 마치 뭐가 얹힌 것처럼 토해버리고 싶었다. 같은 층 교회 젊은 목사는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바람을 하고 매 주일마다 위층 치매노인들 목욕을 시키러 가는 모양이었다.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눈치가 그랬다.
아내는 딸애와 함께 산보를 나가고 나는 들어앉아 유진 피터슨의 <일상, 부활을 살다>를 읽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와 같은 책이 위로가 된다. 그 부활에 직접적으로 동참했던 이들을 거명하며 저들을 추적하는 유진의 서술이 듣기 좋았다. 아니 그 자리를 함께 했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뒤에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일곱 명의 제자들. 마태가 언급하는 두 명의 마리아와 마가가 지목한 향료를 들고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간 여러 명의 여인들. 누가가 진술하고 있는 예수의 시신을 돌려받으려는 네 명 이상의 여인들. 그리고 오백 명 앞에 보이신, 주님.
심지어 바울에 이르기까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8-9).” 의심하였던 도마, 믿지 않았던 젖동생 야고보. 그래 맞다. 여러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라는 유진 피터슨의 논리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렇지. 나는 심고 누군 물을 준다지만 이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기특하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초는 물과 햇볕만으로 거뜬하였다. 아버지는 줄기를 어루만지시며 잘 자란다, 참 잘 자란다, 하시며 감탄하였다. 그러게, 나도 나이가 드나. 화초를 가꾸며 물끄러미 얘들을 보고 있으면 말 그대로 기특하기만 하다. 사장은 복도마다 가격이 제법 나가는 나무들을 가져다놓았는데 아무리 해를 보지 않아도 된다지만, 그런 식물은 없는 것이다. 네 개가 다 죽고 하나만 간신히 푸른 잎을 떨구지 못하고 있는데.
어쩌면 우린 고이는 곳이 아니라 흐르는 곳일지도 몰라. 아내의 표현이 시적으로 들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또 어떤 아이로 인해 끙끙, 앓는 소릴 하자 그리 말했던 것이다. 그럴 때보면 참 강하다 싶은 게 아내는 굳이 미련을 두지 않는다. 있을 때 잘해주되 떠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어서, 거기까지! 하고 마음을 접으면 더는 미련도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누구에게 처벌처벌 마음을 기울려니까 또 그러다 혼자 상처 받지 말고, 하는 식으로 나를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게. 내가 좀 미련이 많기는 하다.
결국은 사람들이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 부활의 주님을 마주한 게 아니었다. 저들은 각각 저들의 삶을 지탱한 것뿐이다. 그 일상이라고 하는 어마 막중한 중력이 끌어당기는 가운데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제 갈 길을 가는 가운데 주님은 찾아오셨다. 그야말로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은’ 나에게도 말이다. 내가 언제 내 의지와 노력으로 돌이켜 주를 만났던가? 나야말로 제멋대로 굴다, 주님의 은혜라. 주가 아니셨으면 그 주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었을까?
아이에 대해서는 뭐라 정리하려고도 단정 지으려고도 하지 말자. 나는 뒤치락거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각설하고 장문의 문자가 될지언정 뭐라 작심한 말을 해야 하나? 궁리하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놓아두자. 그동안 들려주었던 말씀이 있고 내가 살아왔던 은혜의 증거들이 있을 테니, 돌이켜 주를 바라는 자리에는 주가 마중하실 것이다. 내가 부활의 주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겠다. 군대에 있는 녀석도 몇 번은 휴가를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속상한 마음에 돌아누워 주의 이름을 부르고 답답하여 또 한 번 부르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행하게 하려 하심은 오늘 내게 두신 바, 이 한 날의 삶으로 살아서 주의 부활을 맞이하고 동참하게 하시려고. 그런 거 보면 나는 병적으로 메모를 하고 그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삼으려고 한다.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인데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내가 의도하여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요한의 신학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성부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을 연상하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닮거나 배워서 그리 모방하거나 열심을 다해 얻을 수 있거나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동의하기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자꾸 내 마음은 서운하여서 속상해하는 걸 마치 무슨 훈장쯤으로 여기고 싶은 모양인지.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4).” 그래. 내 의지가 아니었듯이 주가 끊으신다. 주가 다스리신다. 나의 선행이 또 돌봄이 아이를 감동시킨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고, 내 수고와 애씀이 그리 여겨지는 것이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곧 주가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아이를 품고 사랑하되 있을 때 잘하자. 하필 왜 또 이런 애를?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한 아이를 염두에 두며 그리 여겼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야. 아내와 둘이 험담을 하듯 얘기하다 내가 아직 멀었구나, 참 멀었구나, 생각하였다. 정말 신기하기도 하지? 딱 그 스타일. 싫어도 너무 싫어서 싸가지 없다며 혀를 끌끌 차는 것도 아까워했을 그런 아이였다. 그러니 나의 싸움은 정작 내 안에 있었다. 싫어하는 그 모습이 곧 나였으니까 말이다. 내가 딱 그런다. 여전하여서 번번이 그런 나 자신과 마주한다. 신기할 정도다.
그렇구나. 나의 삶에 덧대어지는 게 부활의 삶이 아니구나. 닮거나 흉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서 살아야 하는 삶이었구나. 더하여져 어떤 포개심의 은총이 아닌 것이다. 전혀 새로운,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것이다. 내가 사는 게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 그런 것이었구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나를 이처럼 다른 이와 엮으시는 단 하나의 이유, 부활을 살라는 것.
저 아이의 되바라진 모습을 보면서 그 잘난 체하는 자기 멋대로 구는 행동과 말투를 거슬려하면서, 왜 그러시는지 알겠다. 내가 딱 주님에게 그랬었구나. 그런 나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친구로 함께 하시는 것이어서 같은 델 바라보고 가자는 소리셨다. 사랑은 마주보고 우정은 같은 델 본다는 말이 있듯이 왜 새삼 친구라 하셨는지 알겠다.
이를 C. S. 루이스는 ‘서로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라 표현했던가?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시 129:5).” 덩달아 싫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와 같이 할 수 없는 게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6).” 저들의 주장과 생각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지붕의 풀 같더라. 곧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7).” 돌이켜 보면 그저 오늘의 내가 되레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부터는 바로 알자. 바로 아는 게 곧 영생이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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