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랍바를 낙타의 우리로 만들며 암몬 족속의 땅을 양 떼가 눕는 곳으로 삼은즉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에스겔 25:5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이스라엘에 대한 주변국들의 강퍅함에 대하여 그 심판의 예언이다. 그것으로 도리어 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스라엘의 징계 받음을 비웃듯 업신여겼던 민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내가 랍바를 낙타의 우리로 만들며 암몬 족속의 땅을 양 떼가 눕는 곳으로 삼은즉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25:5).”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아무나 사랑하시지 않고, 모두가 구원 받기를 원하나 전부가 그럴 것이라 여기지 않으시고, ‘오직 너’ 주의 백성에 대한 관심뿐이시다.
많은 아이들이 등교를 할 때 올망졸망한 저들의 재잘거림이 사랑스럽고 모두가 귀하다. 한데 글방에 나오고 것도 예배에 참석하는 아이는 저만치 많은 아이들 무리에 섞여 있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겠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할 때 모든 아이들에 대하여 갖는 마음과는 별개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왜 옷을 저렇게 얇게 입었는지, 걸음걸이는 왜 그런지, 곁에 같이 있는 애는 누군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내 안에 생겨나는 친밀함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두시는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어? 하고 반가워하다 할아버지다! 하고 놀리며 낄낄거리는 아이가 어쩜 그렇게 사랑스럽던지. 내가 아는 아이니까. 그 사정과 형편을 두고 주께 아뢰고 기도하는 아이니까. 이 녀석! 하고 꾸짖으면서도 나는 돌아서서 아이가 싫지가 않은 것이다. 너도 주일 날 오겠니? 수업하다 세 번째로 오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대충 느끼고 들어서 알고 있었는지, 왜요? 하고 묻지는 않았다. 같이 예배드리고, 밥 먹고, 놀자. 나의 전도는 너무도 간단하고 싱거워서 서로가 풉, 하고 웃었다. 엄마에게 여쭤보고요. 아이의 대답이 고마웠다.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조금은 지겹다. 때론 하나님의 구애(求愛)하시는 마음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어쩜 그렇게도 몰랐을까? 나의 지난날이 중첩되면서 더욱 주의 인자하심이 느껴진다. 어르고 달래며 또는 꾸짖고 징계하시면서 참 복이 뭔지, 왜 그처럼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는지. 내가 날 보면 뚜렷하게 느껴진다. 어쩜 그렇게나 자주 토라지고 또 마음이 울적하고 시무룩하여 주를 외면하곤 하는지. 예전에야 몰랐으니까 그랬다 쳐도, 지금도 여전하여서 주를 바라는 마음이 어쩜 이리도 연약한지.
‘우리는 누구나 다 환자다.’ T. S. 엘리엇의 말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가끔은 내가 신경증이 있고 불안증이 있다는 게 감사할 때도 있다. 아프지 않은 척, 환자가 아닌 듯 굴며 산다는 일이 얼마나 처량하고 한심한 일인지. 5학년 아이가 글을 쓰고 있는 바람에 옆 사무실 사람이 찾아왔다가 도로 나갔다. 짐을 빼고 이사하기 하루 전이었다. 안 됐기도 하고, 그 고집이 답답하기도 하였다.
언제든 나오시라.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겠다. 힘내시라. 나는 주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그리 기도하였다. 주께 돌아오기까지 그 허망함에 대하여. 쓸 데 없는 데 헛힘을 다 쓰고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낙타 우리’가 되고 ‘양 떼가 눕는 곳’이 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주는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걸 알려줄 수 있을까? 우리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다. 이웃하고 있는 저들에게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그 사람과 은혜로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날마다 기도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사느라 고달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신기루를 좇아 잠시 희망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죽을 고생으로 간신히 남한까지 내려와서 또 그러고 살자니 죽을 맛이라. 선생님은 참 평안하신 것 같아요. 저이의 말이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변하여지길. 우리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 돈도 아니고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욥 24:23).”
얼마나 더 시간을 더하고 고통스러움을 겪어야 이와 같은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을까?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존 파이퍼의 족히 스물 한 명의 <영웅들> 시리즈를 읽으면서 공통된 구역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 ‘고통’이었다. 저마다 어쩜 그렇게 기구한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그 형편과 사정이 열악했으나, 평안하였다. 참 평안을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보옵소서, 내게 더하시는 고통이 평안을 주려하심이라.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아멘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죽었다 깨어나도 고통이 좋은 게 아니다. 아픈 건 싫다. 고통스러운 건 어김없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는 이제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그것으로 오는 것은 고통뿐이라. 주님 없이 복되고 평안한 건 없었음이다.
이제 나는,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뭘 몰라서가 아니라 이젠 확실히 알아서다. ‘젖 뗀 아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본능적으로 그저 그리 되어지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젖을 뗀 아이다. 노는 맛도 알고 엄마 품을 떠나 신기한 걸 찾아 관심을 두는 나이다. 부산하고 수선스럽고 자기고집이 보통이 아닐 때다. 아무리 그러해도 엄마 품을 알기 때문이다. 거기서의 평온함을 아는 것이다.
그래 맞다. 하나님은 내가 아는 것보다 백배는 더 인자하시다. 천배는 더 긍휼하시고 만배는 더 자비하시다. 이를 배웠다. 이를 내게 알게 한 것이 고통 중에서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왜 더 힘써 주를 알아야 하는지, 저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대하여 왜 올바로 알고 의지해야 하는지 ‘더욱 많이 힘쓰라.’
그와 같은 수고와 애씀은 아까운 게 아니다. 딸애가 먼 출퇴근길을 유난히 힘들어했다. 그건 아직 직장에 대해 강한 애정이 없어서 그래. 나는 말하였다. 누구를 만나러 갈 땐 더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길이 짧아져서가 아닐 것이다. 왜 더욱 힘써야 하는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누구보다 바울은 그리 간절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본 사람은 안다. 투덜거리다가 나는 내게 보이신 주의 사랑을 돌아보면 안다. 더욱이 교회라. 주가 어찌 이루시고, 오게 하시고, 다루시고, 건사하시는지. 테일러의 표현의 빌려 정리하면 ‘확실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부족함이 없다.’ 나는 이것을 피부로 느낀다. 형편이 어려워 교회 세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했더니, 주인이 찾아와 월세로 관리비고 따질 것 없이 얼마로 하자. 하고 저가 낮춰 제안하였다.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다. 교회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결코 공급하심이 부족하지 않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렇지 그렇지.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는 걸 어떻게 하면 저이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이웃하고 있는 사무실에, 저들 안 믿는 이들에게 나타내고 증거할 수 있을까? 주께서 함께 하시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하나님만 나타나시기를. 하현이란 이름과 같이 온전히 주만 드러나기를.
내가 아는 하나님보다 더 많이 최고로 훌륭하시다. 그러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취하지 마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일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19-21).” 직접 화답하고, 마음으로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는 일. 살면서 보여주는 일이다. 내게 임하시는 주의 평안을. 우리 교회에 임재하시는 주의 권능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그리할 수 있었던 게 ‘택하심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처럼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부지런히 성전으로 올라가게 될 줄이야. 종일 들어앉아 있으면서 싫다 싫다하지만 그게 가장 좋은 것을.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곧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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