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전봉석 2017. 11. 14. 06:45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

에스겔 24:12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5

 

 

 

덩이째 넣고 삶아도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않으니,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그 세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겠다.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졸이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되게 하라(겔 24:10-11).” 그러나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12).” 벗겨지지가 않는다.

 

말씀을 이어서 보자. “너의 더러운 것들 중에 음란이 그 하나이니라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하나 네가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리라(13).” 이제 알았다. 주의 분노 때문이었다. 그리 내버려두신 주님의 또 다른 관심이었다. 내버려두심으로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그랬던 것이구나. 유난히 ‘사람이 먼저’인 세상에서 자율성은 강조되고, 전문가들의 손길에 의존하면서 더는 상쇄가 안 된다.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소비하고 희생자로 여기면서 자존감은 낮아졌다. 모든 분야에 전문가를 부각시킴으로 우리는 모두 저를 의존한다. 음식을 같이 만들고 고장 난 것을 함께 수리하면서 두런두런 그 해결해나가던 방식은 사라졌다. 수동적으로 기다림을 강요받는 시대다.

 

상실한 마음은 음란에 도착한다. ‘너의 더러운 것들 중에 음란이 그 하나이니라.’ 그 정도는 그저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하나 네가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니’ 그러한 것으로 위로를 삼고자함이었다. <나인 라이브즈(9 lives)>란 영화를 하나 봤다. 아홉 여자가 각각 여자의 생으로 받아내는 감정을 그리고 있다. 각각이나 서로 얽혔고, 서로 엮였으나 지독히 개별적이어서, 서로 분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으나 그 매개가 성적갈등이었다. 아,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는 오늘 분문의 말씀이 중첩되는 것 같다(13).

 

일찍이 어려서부터 우린 의도적으로 자율성을 습득한다.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강조하면서 배움에서부터 소비적인 자세를 취하고 적극적인 자아의 개입이 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점점 더 멀어지게 하였다. 존 파이퍼의 <확신의 영웅들> 가운데 조지 뮐러에 대해 읽었다. 고아원을 여섯 개나 건립하고 수만 명의 아이들을 도우면서 저는 결코 빚을 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란 확신,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란 걸 깨달은 것이다.

 

저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음란한 생활과 도둑질로 청소년시기를 보냈다. 저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면 돈 벌기가 쉽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신학을 권했고 뮐러는 그러한 계기로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으로 신묘막측하시다. 어찌 추측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이가 주의 말씀에 붙들려, 92년의 생을 다하는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자 그리 몸부림친 것이다. ‘시끄러운 자기주장을 버리고 조용히 말씀 묵상으로’ 자신을 바로 세웠다.

 

발광에 가까운 이 시대의 자아실현이 곧 우리의 자율성이 얼마나 우리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지. 오히려 자율성은 고립되고 모든 생활이 전문가를 의존하면서 점점 나약한 존재가 되어가는 반전의 시대다. 아이러니한 것이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듯 조지 뮐러의 생을 상상하다가 다다르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다. 어찌 그런 자를, 그런 의도를 선으로 바꾸실 수 있을까? 지난 날 나의 이야기와 중첩되면서 은혜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였다.

 

어떠하든 주는 선하시다는 것.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68).” 살아서 삶으로 주의 표징이 되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를 각각의 자리에 놓으셨구나.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이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이 간절하게 생각하는 자녀를 데려가는 날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려 주지 아니하겠느냐(겔 24:25-26).” 비로소 모든 걸 잃을 때에야 주 앞에 나아와 간증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으니.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27).” 오늘 말씀이 어제 본 영화와 읽은 책의 내용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돌이켜 나를 왜 여기에 두셨는가, 하는 데 뚜렷한 증거로 다가온다. ‘이같이 나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 뮐러의 확신도 그것이지 않았던가.

 

‘무엇이 우리를 하늘에서 극도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지식일 것이다.’ 뮐러의 말에 동의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뿐이고, 그러자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로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이 쉬지 말아야 한다.’ 그는 덧붙여서 말했다. ‘나는 내가 매일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내 영혼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알았다.’ 메모해둔 노트를 보고 옮겨 적으면서, 새삼 오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데 감격스럽다.

 

그랬던 것이구나. 이처럼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글로 쓰면서도 내가 너무 도식적인 게 아닌가. 또는 이와 같은 책을 주로 읽으면서 다소 소비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였는데. 그게 그러니까 내가 그리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 안에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주의 영이 이끄시는 일이었다. 어딜 가도, 혹은 새벽 일찍 서둘러야 하는 날에도, 그럼 먼저 서둘러 말씀 묵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먼저 확보하려고 하는 마음의 열심이 내 의지에 의한 노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때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또 왜 이런 내용의 글을 쓰거나 읽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뮐러가 신경 썼던 게 그런 것이었다는 것이구나. 곧 자신의 그러그러한 면이 은사가 아니라 은혜인 것을. 은사는 각별한 쓰임이면 은혜는 일반적이어서 누구나 주 안에서 취하는 것임을 말이다. ‘구하면 주신다.’는 논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래서 더 선명해진다. 죄인들에게 교훈은 빼앗는 길뿐이다. 누군 그것을 원망하고 누군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 간단명료한 진리 앞에서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아,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7).” 그렇지. 그런 거였어. 주의 열심이 오늘의 나를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다. 금세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어둡고 음습한 하루였다. 등짝이 시려 속옷을 몇 벌 껴입고도 등을 지지고 누워 책을 읽었다. 아내와 딸애가 일 끝나고들 모여 같이 기도회를 할 때 나는 뮐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은, 소위 ‘싸가지 없는 아이’를 우리 곁에 붙이시는 이유를 알겠다. 아이엄마의 돼먹잖은 셈법에서 짐작이 되곤 하듯이 아이의 굴절된 마음은 단순히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영적인 문제였다. 이를 그저 세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 평가가 너무도 속된 것이어서 주의 뜻을 바로 알기가 어렵다. 왜 자꾸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른지 이제는 알겠다. 은연중에 우리는 세상을 기준으로 하면서 입으로만, 마음으로만 주여, 주여 하였던 것이다. 정작 그 생활은 안 믿는 이의 방식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열심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저 고달플밖에.

 

알겠다는 것으로 멈춰 있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꾸 그런 아이들과 엮이게 하신다.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말해주었다. 그러다 문득 한 아이엄마의 열심이 실은 자신이 딸애에게 퍼부었던 그것이었고, 아이의 병적인 단정함이 오늘의 우리 딸이 아닌가, 싶은. 내 이야기로 들려주시는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서 우리는 왜 성경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였다. 아, 말씀이구나. 말씀밖에 답이 없구나. 나의 깨달음은 엉뚱하여서 새삼스러웠다.

 

주가 돌보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그리하여 주 앞에서 정직할 수 있기를. 이처럼 일찍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히시니 그 말씀이 나를 소성케 하심이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19:7).” 주를 바라는 마음이 주의 기쁨이 되길 원하는 것이었고, 이를 더욱 알고자하는 마음이 주가 내게 두시는 은혜였구나.

 

누구보다 단순했던 믿음과 늘 가까이 하는 성경 말씀과 하나님으로 만족했던 뮐러의 생을 들어 하나님이 그처럼 크게 또 사용하신 거였다. 점점 고립되어져 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자유하는 자로 그 표징을 보이시려고, 내게 두시는 만족함이 주님의 것이었다. 마구 떠들고 분별없이 구는 지랄과 미친 듯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데 정신이 팔린 발광의 시절에, 이 지랄발광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멈추는 것. 가만히 좀 있는 것. 귀 기울이는 것. 시선을 한 곳에 두는 것.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130:1).”

 

오늘은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2).” 아니면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 고로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 그러므로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세상이 두 쪽이 나는 일보다, 핵폭탄이 터져 지구가 멸망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한 일이 말씀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 그러므로 주를 바랄지라. 주의 인자하심과 풍성하신 속량하심을. 그는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송량하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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