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전봉석 2017. 12. 4. 07:07

 

 

 

그들에게는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내가 그 산업이 됨이라

에스겔 44:28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감기가 왔다. 콧물이 줄줄 나고 눈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기껏 오겠다던 꼬맹이들은 오지 않고 오랜만에 두 아이가 예배에 왔다. 여전하여서 혹시 몰라 둘 다 밤을 새고 그 시간에 맞춰서 온 것이라 했다. 왜 그러고 사냐고 아무리 뭐라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는 여우고 하나는 곰이었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재채기까지 말썽이라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한 아이는 이제 수능이 끝났으니 정기적으로 또 자주 왔으면 하는데도 듣지 않았다. 큰애는 연락도 주지 않았다.

 

아이들과 같이 만들기로 한 간장떡볶이는 연속으로 푸대접이었다. <현숙한 여인, 룻>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이 열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피곤한 눈꺼풀에 정신이 없었다. 무질서한 삶은 당해낼 재간이 없는 법이다. 가장 편한 건 규칙적인 삶이다. 그렇다고 밤새 뭘 좀 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 밀렸던 드라마를 ‘정주행’ 한다. 1회부터 끝 회까지 한 몫에 다 보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묻는 나의 의문이 가당치 않았다. 재밌으니까요! 하는 깔끔한 대답 앞에 뭐라 더 할 말을 잃는 것이다. 큰애는 전 주일에 뭐라 한 게 걸렸나?

 

아이들이 돌아가고 일찍 들어와 누웠다. 딸애와 아내는 밖으로 나갔다. 약을 먹고 깜빡 잠이 들었더니 조금 멀쩡해졌다. 가방째 놓고 나간 터라, 나는 밀린 설거지거리를 꺼내어 닦았다. 계속 큰애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걸려 못 견디겠다. 조바심을 거두자. 여기까지인가. 주께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그러하기를. 내가 취해야 할 다음 행동을 주께서 주관하여 주시기를.

 

나는 누구인가. “그들에게는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내가 그 산업이 됨이라(겔 44:28).” 오늘 아침에는 내가 맡은 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된다. 주께서 나의 산업이시라. 누구를 보내시든 또 오고 안 오고,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하여는, 주만 바라기를. 다른 일을 두지 마라. 마음을 쓰는 것도 생각을 모아 그리 두는 곳도 온전히 주께로만 향하여. 온다고는 했지만 설마 군포에서부터 올까, 했던 두 아이가 혹시 몰라 밤을 새면서까지 왔다!

 

이 놀라운 기적을 뒤로하면 무얼 붙들 것인가. 한 아이는 거의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서 꼼짝을 않는 터인데, 그 애가 같이 가자해서 왔던 것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필 오전에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우악스럽게 비가 내렸고, 그러자 주일학교 아이들은 전멸하였으며 그 덕분에 두 아이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겠다. 같이 수업을 하던 고등학교 때도 그렇더니 여전하구나. 한 애는 너무 발랄하여 말이 앞서고 한 애는 과묵하다 못해 옆구리를 쿡쿡, 찔러야 대답이나 들을까 원.

 

와서 같이 신앙생활하자. 글 써라. 혹시 이번에도 대학이 안 되면 글쓰기로 가자. 아이를 얼레고 달래며 당최 들은 체도 않는 통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나 딸애가 저들 관심거리를 이어가고 주거니 받거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만 바라자. 주가 나의 산업이라. 내게 두신 일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더했는지 알게 하신다. 쇠귀에 경 읽기처럼, 들어야 말이지. 그럼에도 읽고 또 읽는 게 내 일이겠구나. 그러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8).” 내가 오늘 나로 살 수 있는 것도 주께서 내게 그리 하셨지 않나.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며 어깨를 툭툭, 치는 정도에서 나는 나의 진심이 전달되길 바랐다.

 

충성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믿음의 분수대로 더 바라지 않는 일에서부터 각각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온전히 주만 나의 산업으로 충분하시기를. 그러자고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거기까지인 것을.

 

꼴딱 밤을 새고라도 일요일 그 시간에 맞춰 오게 되었던 그 일에 대하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나는 전하고 아이들은 듣고, 이를 이루시는 이는 성령이신 것을. 큰애가 연락도 주지 않은 데 따른 서운함과 염려도 그게 내 몫이라면 찧고 빻고 마음이 요동치는 대로 안고 가는 수밖에. 그러느라 못 견디겠어서 주께 기도하고 아뢰면서, 주만 나의 산업이시라. 내가 사는 날 동안 주를 드러내는 일밖에 달리 더 무얼 할까?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이보다 더 값진 맡기심은 없을 거였다. 누구는 다양한 재능과 달란트로 주께 봉사하는 것이겠으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주가 세우실 것이다. 흘겨듣는 말씀이었던 것도 어느 훗날 딱 맞춤한 그 자리에서 생경하여 전혀 엉뚱한 물음으로 던져져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실 것을 믿는다. 나는 모르지만 아직은 몰라도 된다. 그러니 믿고 가는 수밖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려고 애들을 또 나를 주 앞에 부르시고 마주하시고 전하여 듣게 하시는 것임을. 헛되지 않을 것을 믿는 일이 주께 그 다음 일을 양도하는 일이 되겠다. 주가 하시게끔. 주가 하실 것을. 그저 내가 할 일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2:10).”

 

그를 먼저 사랑하는 일, 주가 나를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싫어함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주일 날 오라니.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저 개인의 취향일 뿐인 주를 믿고 바라라니. 오히려 이런 날씨에 아이들이 안 오는 게 당연한 일이지 오는 게 이상한 일 아니겠나.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이상하지 저들이 이러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게 마땅하지 않겠나.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 주를 산업으로 맡은 자이다. 저들의 외면은 당연하였고 싫어함을 당하는 일도 마땅하겠으며 그저 막연하여서 어렵기도 한 게 맞겠다. 그걸 자꾸 어떻게 해서든 저들 눈높이에 맞추려고 복음을 낮추고 또 저렴하게 싸구려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나. 아닌 건 아닌 거라. 권하고 전하였으면 이제 그냥 두자. 주가 하신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3).”

 

그러므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곧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주가 하시는 일에 나는 주가 하신다는 걸 말하여주는 사람으로 성전을 지키고 늘 그 자리에 있어주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그의 뜻하신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에 대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내가 할 일은 지극히 단순하였다. 하나님이 나의 산업이시라. 내겐 주지 마라. 다른 사람들처럼 살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50:1).” 그의 성소에서 나는 묵묵히 주를 찬송하며,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2).” 그러는 사람이었다.

 

달리 뭘 더 어쩌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내가 마치 저 애를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내 일이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만 주신다. 저 애를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4:12).” 그저 무던하여서 본이 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6-17).” 주 안에 내가 거하면 내 안에 주도 거하신다. 이 단순명료한 논리 앞에 아멘. 이로써 담대하여 저 아이들을 두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것이리니.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주만 찬양하기를.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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