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에스겔 43:10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시편 149:1
교회로 이루신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어찌 다루고 꾸며 이루어내는 일이 아니었다. 이를 보여서 저들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일, 돌이켜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하는 일. 새 노래로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서 찬양하는 일이 교회의 우선이었다. 곧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시 149: 4-5).”
주를 바라며 구하는 일, 누가 시켜서야 어찌 그 일이 되겠나? 되게 하시는 이가 있었으니 저가 교회를 이루시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 동생네가 와서 이런저런 얘길 나누고 즐거워할 때 나는 매일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감기가 왔는지 콧물이 줄줄 나고 머리가 띵하였다. 아내가 수고가 많았다. 제수씨가 얼마 전 공황끼가 왔었다는 데 가슴이 철렁했다. 생활에 눌리면 더는 어쩔 수 없는 가운데 속수무책인 게 그래서였다.
원래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게 다르고, 느끼는 것과 실천하는 게 다르다. 그래도 자식 농사도 내 자식을 남의 자식 대하듯 하면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는 게 그런 소리다. 한 발 물러서지 못하는 건 미련이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방기다. 어디서 읽은 내용 중에 항생제를 곰팡이 균에서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은 12년간 연구에만 몰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래놓고도 누구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고 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을 거라 여겨 미루던 걸 나이든 동료 의사들이 저의 연구물을 발표하면서 세상을 바꾸었다.
플레밍은 많은 여자형제 셋, 남자형제 다섯 사이에서 자랐다. 부친은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60세에 둘째 부인을 얻어 플레밍을 얻고 뇌일혈로 쓰러져 2년 뒤에 죽었다. 나이 차이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플레밍의 의견은 늘 무시되거나 존재감이 없는 아이로 성장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싶으면 저의 형제 구성원과 그 부모를 보면 짐작이 가는 일이다. 누군들 상처 없이 세상을 살 수 있겠으며 외로움 없이 사랑을 갈구할 수 있겠나만. 나는 뒷전에서 안 듣는 척하면서 아내와 제수씨의 이런저런 대화를 들었다.
그렇지. 어릴 적의 나에서 벗어나서 사는 사람은 없는 것이겠지. 번번이 발목을 잡고 여전히 다르지 않은 형태의 추구와 노력으로 자신의 성장을 미루게 하는 주범은 ‘어릴 때의 일’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러기 위해 얼마나 무던하였던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그 싸움이 치열하지 않으면 어른아이가 되어 산다. 여전히 장난감에 환장하고 그때의 추억을 더듬으며 어른의 일로 도모하려 든다. 성향은 더욱 끔찍한 것이어서 여전히 자기만 알고 고집하고 떼쓰고 억지 부리고 오만방자하며 변덕스럽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추구하면서, 영적 성장에도 막대한 훼방이 되곤 한다. 물론 어린아이 때의 일을 버리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덜 구하느냐 더 구하느냐 할 뿐이지, 저마다 여전하여서 그 성향은 물론 억눌린 감정이나 태도는 다른 형태로 변형을 했을 뿐이다.
읽고 있던 책도 그런 내용이었고 해서 그런가, 나는 자주 조카아이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였고 우리 어릴 적 가난하였던 목회자 가정의 네 남매를 생각하였다. 어떻게 그 시절을 다 견뎌왔을까? 돌아보면 주의 은혜였다. 어느새 나는 뒷방늙은이처럼 물러나 있어 다소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거칠고 둔탁할 수밖에 없는 유년의 시간이 안쓰러움으로 다가왔다. 안 됐고 미안하고 소중한 시간이라. 이 모두를 선으로 바꾸시는 주의 은총이 귀하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그런 거 보면 플레밍의 12년 동안의 집념이 괜한 게 아니었지 않나. 그럴 수 있었던 힘이 또 숙련된 저의 고독함에서 나왔을 터. 가끔씩 생각이 머무는 건 그 고달픔이야 죄의 결과라 해도 이를 바꾸어 선으로 이루시는 게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있었던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의미는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보복 대신 긍휼을, 미움 대신 측은지심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니 허투루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럼 그 짐을 고스란히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할 노릇이고.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나의 노련한 태도나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이었다.
곧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그렇지. 나는 이것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오늘의 나를 비롯하여 나의 아이들이 이처럼 주를 바라며 건장하게 자라준 데 대해 깜짝깜짝 놀란다. 우리가 애써 아이들을 반듯하게 키운 게 아니었다. 나의 형제들만 해도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숱한 이사와 늘 쪼들리는 형편 가운데서도 오늘 날 모두가 주의 길을 가고 있으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이보다 더 확실한 말씀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었다. 어린것들이 토요일마다 어디 찬양사역을 다니고 이를 즐거움으로 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않나. 모처럼 사역이 없는 토요일이라 겸사겸사 금요예배 끝나고 인천으로 온 것이니, 물끄러미 아이들을 보면서 그저 신통방통하였다. 다들 게임에 중독되고 부모와 반목을 일삼으며 각자가 병든 채 외면하고 사는 세상에서.
그렇구나.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그러하여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삼으심이다. 교회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연일 세습 문제로 사회를 어지럽히고 논문 표절이니 공금횡령이니 하는 따위로 사람들의 외면을 자처하는 게 어찌 그 사람만의 일이겠나.
우리가 욕먹지 않으려고 굴면 하나님이 욕먹는다. 우리가 당하지 않으려고 들면 하나님이 당하신다. 우리가 나은 척, 인정받으려 하면 하나님이 외면당하신다. 온통 교회가 너무 비대해지고 목회자들의 파워가 너무 세고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니, 교회는 이제 여느 기업들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묵묵히 주만 바라고 주의 길 가는 성도들도 있었으니,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우리 형제들과 그 후손들은 꾸준히 그러하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덜 알려지고 사는 일은 늘 팍팍하여 곤란하기 이를 데 없다 해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면 그만하여서 충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이를 바로 아는 것이 복되지 않겠나.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이를 알고 붙들 때 삶은 참 귀하고 소중할 따름이다. 어찌 나의 허물까지도 선으로 바꾸어놓으셨을까?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어찌 이 자리에 두신 것일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렇지. 그렇게 우리 안에 믿음을 두신 것이구나. 해준 것도 없이 그저 저들끼리 놀게 하고는 나는 물끄러미 아이들을 지켜보며 신기해하였다. 저렇던 것이 어느새 훌쩍 자라 스물여덟, 스물다섯이 되었으니. 뜬금없이 한 녀석이 편지를 보내었다. 스물여섯이 되었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러다 문득 글방 생각이 나고 내 생각을 하였다면서.
세월은 참으로 가차 없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주를 의지하든지 외면하든지. 영생을 바라고 구하든지 하찮게 여겨 소홀히 대하든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이 모든 게 선을 이루어가며 하나님은 선하심을 증거할 따름이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
살아서 내 영혼이 살아서 이를 알고 누리고 느끼며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내가 주를 사랑한 게 아니요, 그럴 가치도 없는 나를 주가 사랑하신 것이었으니. 나는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이 글을 쓰다 눈물이 핑, 돈다. 은혜이지 않나? 이보다 더 큰 은혜가 무엇이겠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
감사와 영광을 홀로 받으시기에 충분하다. 나는 미련하여서 그저 오늘의 나 된 것만으로 감사가 넘칠 뿐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굳이 개의치 않는 까닭은 주께서 그러하심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8).”
이를 아는 까닭이라 더는 분할 것도 억울할 것도 불안할 것도 없다. 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말씀 앞에 앉아 나는 그저 아멘, 아멘 한다. 곧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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