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에스겔 48:14, 35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편 4:3
주가 여기 계실 때, 이는 모든 게 거룩하게 구별됨이다. 팔지도 바꾸지도 못 할 숙명 같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너무 고단하여 가끔은 다른 육신이었으면 할 때나 사는 데 따른 비용이 너무 가중하여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도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단순히 주어진 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사는 것을 일컫는 말씀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어서 주신 이와 두신 이가 한 분이라.
내가 주를 바란다는 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주를 따른다는 데 귀결된다. 하면 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숙명적인 삶을 일컫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지는 일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가령, 너무 유치하지만 어제 나의 하루는 그러했다. 점심께 다시 속이 뒤집혔고 나는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입원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럼 당장 내일모레가 주일인데… 하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식은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려 혼났다. 가지고 있던 진정제를 한 알 삼키고, 혹시 내가 없으면 전에처럼 서로 설교원고라도 같이 읽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곧 오는 아이에겐 수업을 못하겠다고 문자를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어지간하여져서 아이 수업까지는 하자, 싶었던 것이다. 아이는 특성화고등학교를 떨어졌다며 조금은 의기소침해했다. 괜찮다, 잘 됐다, 오히려 그러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이를 격려하며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우리는 늘 사는 걸 염려하지만 정작 어려운 일이 오나니, 죽음이 늘 목전이라. 이는 지나야 하는 관문일 뿐 그게 끝이 아니라. 정작 우리에게는 죽음 너머의 생이 있단다. 어떻게 비유할까. 마치 어디 여행을 온 것이야. 여기는 잠시 머물 곳인데 기를 쓰고 사는 집을 보수하고, 갖고 갈 수도 없는 것을 구하느라 평생을 바친다면 얼마나 한심하겠냐?
그렇게 아이 수업까지 끝마치고 잠깐 누웠는데 깜빡 잠이 들었고 속이 한결 나아졌다. 비유로 놓고 보니 유치하지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이를 교회를 위해 내 몸에 채운다는 말씀을 말이다. 설교원고를 쓰기 싫은데도, 저런 아이를 데리고 뭐라 일러 가르치고 위해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는 일도,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자를 주의 이름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도, 이처럼 아침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하고 글을 쓰는 일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고, 덩달아 허리는 또 왜 아픈 것인지. 짜증스러운 몸을 이끌고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하는 것. 그럴 수 있는 힘을 주가 주신다는 말씀 앞에 나는 아멘이다. 당장 응급실에라도 달려가야 할 것처럼 호들갑스럽던 나의 고통은 그렇듯 또 적당하였다. 적당하여서 혹시 몰라 출력해서 쓸 수 있게 설교원고 초안을 만들어두고, 아이가 왔을 때 주의 마음으로 아이를 위로하고 주일을 권하면서. 이러는 게 그런 말씀이지 않겠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여기서 주님의 양은 내 앞에 두신 한 아이 한 영혼이겠으나 또한 나 자신이기도 한 것이어서, 먹이고 다스리고 먹여야 한다. 아픈 게 어디 즐거운 일이겠나만, 사는 날 동안 아프지 않은 인생이 또 어디 있으랴. 오늘 말씀은 그래서 구별됨을 주목하게 하신다.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14, 35).” 주어진 삶에 대해 누구를 탓할 거 없고 이를 팔지도 바꾸지도 말 것이어서, 처음 익은 열매로 주의 것을 구별하라. 이는 여호와삼마라. 주가 거기 계신다. 내 안에, 저 아이를 두고 생각하며 또 주께 바라게 하신다. 주일을 생각하며 아파도 주일 지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에 해가 되지 않도록.
언제부턴가 그러고 있는 내가 신기할 따름이다. 중3 아이. 부모는 어떻게든 아이를 잘 건사하여 바르게 키우고 싶은데 아이는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공부는 바닥이고 생각은 무뇌아처럼 즉흥적이라 하니 그 부모 속이 오죽하겠나. 돌아보니 내가 그런 아이였다, 싶은 마음이 아이를 위로하고 두둔하게 되었다. 그냥 일반 인문계를 가게 됐다는 말을 무슨 포기각서라도 작성해야 하는 아이처럼 시무룩하게 말하는 것을, 그럴 거 없다. 잘 된 일이다. 지금 네 마음 상태로는 인문계를 가도 남들 내신을 깔아주는 아이밖에 안 될 거라 여긴다면 특성화고등학교를 가도 다를 게 없다.
하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게 하셨으니. 좀 전까지 죽을 것 같아 어디 큰 병원으로라도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나. 주가 계신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3).” 내가 주를 부를 때에 주가 들으시리로다. 나로 하여금 경건한 자로 서게 하시려고 오늘도 이리저리 굴리신다. 때론 구슬프고 고단하여 어렵지만,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착한 아이다. 모처럼 그래도 제대로 된(?) 가정에서 자랐고 나름 성실한 아이를 만났다. 키가 185에 거구라 아이 앞의 나는 왜소하다. 그러데 신기하게도 싫다는 소리 안 하고 글방에 오는 것이니 아이엄마도 신기하달 수밖에. 어제는 ‘친구들’에 대해 글을 써보게 하였다. 어떤 사람인가 알려면 저가 어울리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보면 안다. 왜 그런가 싶으면 뭘 좋아하는지 눈여겨보면 알고, 어떤 문제가 있나 싶으면 버릇이나 저의 습관을 살피면 간단한 일이다. 이제 우리가 만난 게 세 번째니까, 아직 갈 길은 멀었다만.
주일에 오너라. 같이 가자. 나는 아이를 일러 그냥 그렇게 말했다. 어쩌겠나. 나는 말을 던졌고 아이는 들었고, 이를 행동할 수 있도록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저가 오든 안 오든 나는 여전하여서 또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전하며 같은 마음으로 주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저 애가 아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기쁨이어야 한다.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사 29:19).”
아이를 대하는 일도 정작 아이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정작 나의 건강 때문이 아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일도 정작 교회를 위한 게 아니다. 이 모두는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그렇지. 그런 것이다. 나의 반석이며 요새요, 내가 피할 바위이며 방패이시다. 나의 구원의 뿔이요 산성이시다.
조금은 알겠다. 내가 양을 먹이는 일은 양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양이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 자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이유는 저가 내게 잘해서가 아니라 저 자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일의 주인이 되시는 이. 사사와 건건이 모두 주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어떠한 처지도 상황도 그러므로 짊어지기에 충분한 나의 십자가였다. 팔자가 아니다. 운명론자처럼 체념의 과정도 아니다. 이를 팔지도 말고 누구와 바꾸지도 말고, 그 처음 익은 열매를 주께 돌리는 삶으로써 나는 주의 것이라는.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무슨 말씀으로 이끄실까, 기대되는 바가 늘 새롭다. 좀 더 일찍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다 딸애의 아침상을 차려주고, 여섯 시 반에 아이가 출근하면 나의 하루도 시작이다. 주가 내게 상을 베푸실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5:2).” 늘 나를 노리는 것들에 대하여,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이는 날마다의 일이지 잠깐의 수고가 아니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뜨듯이 매일 매순간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말에 아닌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성실할 수밖에.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 2:3).” 한나의 기도가 적절하였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 3:34-35).” 오늘 하루도 주 앞에서 겸손한 날이 되어 주의 영광을 기업으로 받는 한 날이 되기를.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 4:4).” 오늘 말씀은 이를 당부하신다.
곧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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