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에스겔 47:6-7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편 3:4
결국은 링거를 맞았다. 종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긴장이 풀리자, 식은땀이 나면서 속이 볶였다. 병원으로 가는 그 짧은 길에 겨울바람은 드세고 맑았다. 순간 머리가 띵할 정도로 바람은 청아했다. 어떻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정신이 없다. 링거를 꽂고 약물이 퍼지면서 두통이 좀 가시고 깜빡 졸았다. 수업을 일찍 끝내고 아내가 달려왔다. 본인도 감기 주사를 한 대 맞을 겸 수선을 피우며 옆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바람은 소리를 낼 수 없는 모든 사물의 소리를 대신한다.
나뭇가지는 말할 수 없으나 꺼이꺼이 소리를 낸다. 낙엽은 말할 수 없으나 스르르 슬려 소리를 낸다. 구르는 돌도, 우묵한 자리도, 바람을 빌어 소리를 낸다.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눈 대신 비가 살짝 내렸는지, 습한 소리는 멀리 날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쾌청하여 맑은 날에는 건조한 소리가 사부작거리며 멀리까지 간다. 겨울바람은 소리만으로 눈을 깨운다. 평소 못 보던 사물을 보게 하니까 말이다. 살만해졌나 보다. 이런 게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소리를 낼 수 없어 눈에 보이지 않던 사물이 바람에 의해 소리가 되어 보인다.
일어나기 직전에 꿈을 꾸었다. 교회였다. 아이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혼자 물걸레질을 하고 있어 누군가 하고 한참을 보다 깼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말씀이라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겔 47:6-7).” 교회 부흥을 두고 마음을 쓰지 않게 하시는 데서 가끔은 감사하다. 종종 부흥을 운운하며 전도를 종용하기도 하는데 내게 주시는 마음은 좀 다르다. 좋은 교회가 없어서 굳이 교회를 하나 더 보태려고 우리 교회를 세우신 걸까?
아이가 글을 쓰면서 많이 달라졌다. 지난 주일에 왜 안 왔어? 하고 물었더니 아팠어요, 한다. 그랬구나, 하고 나는 더 뭐라 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리 연결 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말이다. ‘네가 이것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면 난 너무 보잘것없는 것 같아서 대체 뭘 보란 말씀이신가? 의아해할 지경이다. 점점 불어난 강가에 세우시고 강 좌우에 나무가 많은 것을 보여주신다. 설령 내가 마주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스치는 것이 무조건 허무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서 추수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새삼 이 아이들이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걸. 그러니까 함께 예배드리던 큰애가 그래봐야 이제 스물여덟이었다는 걸. 그런 걸 내 마음이 자꾸 성급하였구나, 싶은. 앓는 소리는 평소에 내가 모르던 내 안의 모습이 소리로 나는 것이다. 바람이 지나면서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들어 새삼 그것이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다 알았다. 참 내가 조급한 사람이라. 하나님은 이를 내게 알게 하시는 과정을 오래도 두신다.
영영 그 열매를 나는 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이란 스치는 바람 같아서 좀 뭐가 되려나 싶으면 벌써 저만치 불어가 흔적은 없고 소리만 남는다. 한 아이가 좀 정이 들려니까 그리 그만두었다. 그런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 영혼은 번번이 뺨을 맞는 기분이다. 정주지 말아야지. 그래서라도 이번에는 정주지 말아야지. 혼자 되뇌며 아이를 대하지만 그게 또 되나? 마음 쓴 만큼 바람의 골은 깊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 시편의 말씀이 일깨우시는 것 같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4).” 남의 말이 아니라 내 말을 하는 것이다. 이를 붙들다 보면,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31:19).” 그러니까 말이다. 인생 앞에 베푸시는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때로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서, 맨날 그 타령인 것 같아 싫증이 날 것 같은데, 그럴 때면 또 새삼 일깨우시니, 앓는 소리는 겨울바람의 소리처럼 매섭다. 내 걸음을 내가 어찌 알겠나.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내가 알고 걷는 걸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쁜 와중에야 그런 게 어디 눈에 들어오던가. 당장 정신이 팔려 있는 데야 당최 시끄럽기만 할 뿐이지 뭐라 한들. 어쩌겠나.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올 때에야 알 일이다. 앓는 소리는 참 난해한 소리다.
하나님과 나만 아는 소리다. 겨울바람에 끄달리다 잎을 다 떨군 가지들의 속사정을 누가 알겠나. 앙상하니 가지만 서로 뒤엉겨대며 꺼이꺼이 질러대는 그 소리를 듣고 누가 한여름에 푸르렀던 날을 기억할까. 청명한 겨울하늘이 조각조각 재단되는 건 바로 그 앙상한 가지들 사이에서다. 그저 파란 게 아니다. 네모이거나 세모이거나, 다각형의 파란하늘이 더욱 맑고 청명한 것이다. 이제는 다 떨구고 없지만 모든 잎맥이 바람에 스쳐 출렁이었던 지나 가을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나무보다 인내에 능한 생명이 또 있을까? 나는 콧구멍으로 겨울바람을 들이키며 생각하였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이를 나무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약속을 받기 위함이지 않나. 그 자체로 끝이지는 않을 것인데, 나는 또 그렇게 그만두게 된 아이를 생각하며 혼자 서러웠다.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벽이 너무 뚜렷하다. 다짜고짜 아이엄마가 그만두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내가 저를 설득할 수는 없다. 그럼 아이는 속수무책이라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었던 것처럼 맹랑하여서 청명하다. 어찌 저토록 눈이 시리게 파란하늘일까?
바람은 인내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나무는 속수무책이어서 숭고하다. 심겨진 그 자리에서 평생을 다하며 소리를 맞고 보내고 새로 맞이한다. 특히 사람들이 끌어다 길가에 세워둔 은행나무나 양버즘나무는 더욱 그렇다. 생의 최전방에 서서 온갖 끄달림을 다 당하면서도 자신의 생을 다한다. 거리의 매연을 독차지 하고 누군가의 발길질에 채이고 누가 동여맸는지 대리운전, 바겐세일, 목격자 찾음 따위의 현수막에도 끄달린다. 여기서 저기까지 묶어둔 탓에 바람은 요동을 치듯 현수막을 쥐고 흔들면 동여매진 나무는 덩달아서 고달프다.
저는 어떻게 저런데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종종 나무를 우러러 존경스럽다. 나무는 결코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가지를 열어 바람이 지나게 하고, 바람이 쥐고 흔드는 동안에도 가지는 가지끼리 말을 건넨다. 겨울바람은 혹독하다. 그럼에도 나무는 개의치 않는다.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시 68:2).” 그런 걸 사람만 모른다. 사는 날의 그 수고와 애씀이 덧없음에 대하여, 앓는 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하는 걸 보면.
아픈 게 심해지면 생각도 많아진다. 여러 소리가 또는 모양이 일제히 말을 건넨다. 미처 못 듣던 소리에서, 너였구나! 하고 알아보게 되는 사물도 있다. 하나님이 내게 두시는 그 무엇도 허튼 게 없다. 비록 스쳐가듯 좀 마음을 주려는가 싶더니 휘익, 사그라지는 우리네의 관계에서도. 바람은 말을 못하는 사물에게 말을 주어 말을 건넨다. 겨울바람에 끄달리다보면 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런 소리가 진짜 들린다. 그리하여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겔 47:1).” 그렇듯 내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하시기까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저 발목께인가, 하고 보면 무릎께까지이고.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내 키를 넘겨 잠길 때까지.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그처럼 차고 넘치는 것이다.
드나드는 이를 위해 기도한다. 오가는 이들을 두고 주께 구한다. 저들이 결코 문지방만 밟고 가는 게 아니기를 위하여서 말이다. 이내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말씀이 전하여지는 자리. 서로가 하나님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듣고, 그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리. 그러자고 오늘 나를 거기에 두신 것이고, 혼자 속앓이 하듯 끄들리는 겨울바람에도 거뜬하여서 생을 다하기까지. 주가 거기 두신 곳에 붙들려, 생의 최전방에서도 묵묵히 겨울을 나고 있는 보잘것없는 나무에게서 그 음성을 듣게 하신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오늘 본문은 이를 귀에 속삭이신다. 겨울바람에도 길가에 선 나무는 이와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4-5).” 겨울바람이 아무리 세차다 해도 그것으로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나무에게,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는 듯 주가 응답하신다. 무엇인들 두려울까.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
그렇게 병원에서 나와 칼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는데, 겨울바람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쥐고 흔들며 말해주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3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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