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 1:8-9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5:3
몇 년째 우리 교회 표어는 ‘뜻을 정하여’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이젠 나의 개인적인 선언이 되었지만 항상 나에겐 필요한 작업이다. 하다못해 꼬맹이들을 가르칠 때도 ‘뜻을 정하여’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나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허술하면 금세 우울감은 또 근심과 걱정은 나를 휘어잡기 일쑤다. 이를 바울 사도의 목소리로 되뇌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처럼 ‘뜻을 정하여’ 나의 남은 생이 채워지기를 기도한다.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면서 마음은 늘 여러 마음이라 그게 참 고단하다. 일관되어 흔들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여전하여서 내 안에는 미움도 시기도 누구에 대한 비난도 원망도 여전하다. 특히 ‘금요일의 아이 셋’은 나의 진을 쏙 빼놓는다. 한 주간의 마지막 수업이 혹독한 셈이다. 아이들은 능란하여서 자기변명에 탁월하다. 똥이 마려워서 숙제를 못했다. 하는 식으로 어처구니없는데도 꿋꿋하게 자신을 변호한다. 뭐라 하면 억울하게 느낄 정도이니.
엄마들의 극성이 아이들을 망치고 아빠들의 막무가내가 눈치와 요령을 터득하게 한다. 부모의 변덕이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게 왜요?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다 그렇지 않나? 하고 아이는 결코 굽힐 마음이 없다. 이럴 때 참 난감한 게 그래 알았다, 하고 내버려둬야 하는 것인지(그러자니 양심에 찔리고) 정색을 하고 꾸짖어 야단을 치자니 너무 유치하고(그래봐야 듣지도 않을 것이라) 나는 종종 혼자서 길을 잃는다.
예전 같으면 당장 그만두어 쫓아 보내거나 아이엄마를 불러 경황을 설명하고 (쉽게)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게 아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이제는 내가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일이다. 가령 부모와 논의하면 아이는 더 이상 마음을 열지 않는다. 나는 아이에게 단지 기계적인 존재가 될 뿐이다. 그러니 어쩐다? 얼레고 달래다 그냥 애들 앞에 둘러앉아 ‘제로게임’을 하였다. 게임 중에도 불평인 아이는 불평을 하고 누구 탓을 하는 아이는 여전하였다. 당최 뭘 어쩌라고 하나님은 내게 이런 일을 맡기시는 것일까?
이럴 때, 뜻을 정하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 큰 힘이 된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엡 6:6).”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의 길이란 무던함이어야 할 텐데 내 속은 볶여 문드러질 판이다. 이럴 거면 하지 마!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데, 무엇보다 나의 감정을 추스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뜻을 정하는 일이고,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성실함이었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혼자 있는 시간도 혹은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에서도 ‘오직 주를’ 생각하며 ‘뜻을 정하여’야 성실할 수 있는 것이겠다. 곧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전날에 초안을 거의 작성한 터라 설교원고를 일찍 끝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제로 달래고 눈두덩이가 너무 아파 오후 내내 눈을 감고 있다시피 하였다. 조금 나아진 듯하여 리앤 페인의 <깨어진 형상: 치유 기도를 통한 성 정체성의 회복>이란 책을 읽었다. 동성애나 유독 성에 대한 집착의 원인을 찾아 주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는 것을 일깨우고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저의 말처럼 ‘그저 죽어 사라질 존재는 없다.’ 오늘 날 성에 대한 혼재는 극에 달해서 법적으로도 아예 허용의 범의를 허무는 추세이니, 읽어둘만 했다.
아닌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아니라고 한 대서 통할 리도 없는 일이니까, 같이 기도하는 수밖에. 한 여성은 레즈비언이었다. 저는 자신이 태생적으로 또 생물학적으로 그리 동성애자라 여겼다. 함께 기도하며 분석하던 결과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유아기적에 그의 부친이 성도착증적으로 아이를 탐닉했다. 그 어미는 이를 추하게 여겨 남편을 혐오하면서 아이를 경멸했다. 아버지의 추악한 행위보다 어머니의 외면이 영혼을 피폐하게 했다. 한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했을 아이의 유아기적 기억이 깡그리 훼손된 것이다.
한데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레즈비언 여교사의 먹잇감이 되었다. 저는 평범한 주부이면서 덕망 있는 교사였다. 아이는 선생의 그런 짓을 어릴 때 결핍된 어머니에 대한 모성적 사랑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허용해왔던 것이다. 얼마나 우린 비정상적인 세계에 노출돼 있는지. 이는 또 은밀하게 전해지던 것이 이제는 인권이라는 명분하에 공공연한 성정제성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각 나라마다 마치 선진화의 기치 아래 그러므로 문명화된 사회인 양 버젓이 허용하고 법제화하여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하려 드는 것이다.
변명의 변이 완고해지고 자기고집을 떨칠 수 없는 아이들의 억눌림이 늘어간다. 부모의 눈만 피하면 된다. 이상한 엄마의 요구만 충족시키면 될 일이다. 아빠의 무방비적인 폭압은 눈치껏 회피하면 되고. 그러니 적당하다 싶으면 자기고집에 눌린 아이는 실성을 한다. 이 사람은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꾸짖고 야단치고 협박하고 끝내 엄마에게 통보하거나 이를 레벨로 나눠 평가를 하지 않는 한 통제가 어렵다.
두고 보면서 주께 묻는다. 아이엄마에게 말해주어야 할 일인지 여전히 내가 안고 씨름해야 할 일인지. 아이들과의 씨름은 혼자 힘들지 그 문제를 설명하려 들면 유치해진다. 그런 거 하나 통제하지 못하고 쩔쩔매나 싶은 것이다. 억압과 통제가 아닌 사랑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일까? 그러자니 내가 죽어날 판이다. 수업을 마치면 진이 빠져 노곤하다. 하기 싫다는 말이 늘 목구멍에 걸려 있다. 주님은 왜 저런 애들만 보내시는 것일까? 툴툴거리며 물걸레질을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늘 기적을 동원하신다. 가정예배를 드리려는데 아내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아이들이 기말고사를 보는데 다들 대박을 친 것이다. 온 지 한 달 만에 백점을 맞는가 하면 거의 바닥을 긴다며 스스로도 포기했던 중2 아이가 중간고사에 이어 평균 95점을 웃도는 점수를 내는 것이다. 난 그냥 애들 배고프다 그러면 라면 끊여주는 것밖에 없어! 아내는 너스레를 떨듯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지 않나. 들어주고 격려하고 오냐오냐 하는 일이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지,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다.
주가 하신다. 하셔야 하고 하시게끔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 내가 죽기까지 내가 죽겠다. 마음 상하고 화딱지나서 견딜 수가 없다. 또는 아이가 밉고 싫다. 그래놓고는 내가 볶인다. 그럼 그냥 그러고 말면 되는데, 내가 볶여서 또 위하고 대하고 이해하려 드니, 대체 이게 뭐하는 일인가 싶다.
그래 맞다. 이게 훈련이시구나. 내가 죽기까지 나를 살리시는 일이구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내 안에 주의 영이 거하시는 데 있어 나는 죽겠으나 내가 사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 저를 살리게 하시려고,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5-8).”
내가 살아야 저 애도 살린다. 그러라고 나를 자꾸 죽게 하시는구나. 결국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게 하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나는 아이가 미워죽겠는데 내 안의 주의 영은 저를 그처럼 사랑하사 나를 죽이시기까지 저를 살리시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려고,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앞으론 기도하고 시작해야겠다. 자꾸 그런 마음을 주시는데 면구스럽기도 하고 아이들도 머쓱할 것 같아서 회피해오던 일이다. 어린 것들이 뭘 알겠나, 하는 마음이어서는 안 된다. 어린 것이 그대로 어른이 될 것이다. 어른인데 여전히 어린 것으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자. 새삼 이 아침, 뜻을 정한다. 앞으로는 기도부터 하고 시작하고 기도로 마무리 하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어차피 여긴 교회이지 않았나. 안 되겠다. 안 그럼 내가 죽겠다. 조런 잔망스러운 것들에게 휘둘려 내가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3:1).” 그러자. 그리하자. 대화에 맥이 끊기든, 수업이 이상해지든, 우선은 저가 교회로 온 것이지 단지 글짓기를 배우러 학원으로 온 게 아니니까. 근데 왜 교육비를 안 받아요? 하는 아이의 맹랑한 질문에 나는 주춤하였다. 그러게. 그래놓고는 기도도 없이 대체 나는 뭘 하고 있던 것일까?
다니엘이 먼저 뜻을 정하였던 것처럼,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본디 사소한 것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다. 주만 바랄 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주님이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신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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