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10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편 10:12
매일 똑같은 일 같으나, 늘 ‘하던 대로’ 주를 바라며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복이다. 누구 말처럼 신앙은 양파처럼 자란다. 너무 더디고 때론 눈에 띄지 않는 일이라 아무 소용이 없나, 싶다가도 보면 한 겹 또 한 겹 생겨나고 생겨나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이 비밀을 알고부터 ‘하던 대로’ 하는 것이 때론 복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규칙적인 생활이 불규칙적인 생활보다 경우의 수가 적다.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움직이셨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아침에 일어나 묵상을 하고 글로 쓸 수 있다는 게 유익한 이유는 오전에 글방에 나가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쓴 글을 다시 읽고, 메모를 하고 묵상을 더한다. 더하여진 내용은 하루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그럼 후딱 두어 시간이 흘러 나는 천천히 걸어서 이른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간다. 그럴 수 있는 게 유익이라.
아니면 뭉개는 시간이 많아진다. 뭐하지? 싶은 마음을 없애는 게 단순한 삶이겠다. 비록 겉사람은 낡아지고 볼품없는 것 같으나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을 믿는다. 굳이 확인해볼 수 있는 근거는 없으나 ‘양파처럼 신앙은 자란다.’ 하루는 다음 하루로 이어져 우리의 일부이면서 전부가 되는 것이다. 자투리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도 종종 가르쳐주지만 이게 또한 의지만으로는 어려운 것이다. 은총으로 할 수 있고 은총으로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혹은 새벽에 일찍 깨어서 말씀 앞에부터 앉아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을 우선할 줄이야. 하루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 때론 나 역시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글쓰기를 좋아하니까,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읽어주고 후에 뭔가를 도모하려니까, 하는 것도 결코 아니어서. 나는 묵상글을 쓰기 위해 남은 하루 동안 열심히 읽고 쓰고 메모한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주목하고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주가 더하시는 마음을 적어둔다. 다소 병적이어서 누가 보면 강박증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뭐라 한들.
오늘 다니엘은 자신이 그러면 죽을 거라는 걸 ‘알고도’ 그리 ‘하던 대로’ 행하였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누구 말처럼 내일 멸망이 온다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생각된다. ‘알고도, 하던 대로’ 행할 수 있는 게 믿음이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무슨 일이 겹쳐 뭐가 어떻다는 걸 알고도, 누가 뭐라 하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하던 대로’ 주를 바라며 의지할 수 있는 것. 기도란 종종 무모하여서 그러고 있을 시간에 뭐라도 하나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때가 얼마나 많은지!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 10:12).” 행동가들이 들으면 이 무모함에 대하여 다를 한 마디씩 거들겠으나, 주께 바라고 구하는 일 외에 더 시급한 것은 없는 것이다.
더러 나는 종종 누구 이름을 쓰고 그의 문제를 또는 부탁한 기도 내용을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어떤 날은 너무 멀어서 평소에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이름이 떠올라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잊힌다는 건 그래서 아찔한 것이다. 맞다, 이 사람이 있었지! 하는. 예전에 가지고 있던 어떤 간절함이 사라진 기도는 밍밍하다. 그럼에도 때론 ‘하던 대로’ 그리하다 보면 생각이 머물고 새삼 다루고 고하여야 할 게 늘어나기도 해서 말이다. 어쩔 땐 수첩 한 바닥을 사람들 이름으로 가득 채우다 보면 하나님이 망각을 축복으로 주신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게.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는 일, 이는 구호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다짐이 가져다주는 결과도 아니다. ‘양파처럼’ 어느새 한 겹 한 겹 보태진 기도가 또 마음이 겹치고 겹쳐져서 단단하게 자라가는 것이다. 주는 언제나 옳으시다는 것.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다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19: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이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멘, 할 수 있는 것이다.
곧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0).” 늘 같은 것 같으나 같은 것 같으면서도 나는 또 그런(?) 책을 읽고, 말씀을 찾고, 메모를 하다 이와 같은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안도한다. 주가 의로우시니 말이다. 모든 주의 판단이 옳으시니까 말이다. 정말 이게 맞나? 싶다가도, 나는 틀릴 수 있어도 주는 틀림이 없으시다는 데 안도하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틀리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은 틀림이 없으시다는 게, 그러한 주를 사모하게 하시는 게 감사하였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데 있어 ‘알면서도, 하던 대로’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겠나.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하는 시인의 고백이 틀리지 않다. 이를 그냥 견뎌야 하는 일이라면 하루이틀 하다 말 것인데, 그 맛이 날마다 새로운 것이다. 또 읽는 내용인데도 새롭다. 다 아는 이야긴데도 전혀 다른 감동이 온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게 말이다. 한 겹 한 겹 자라난다는 것.
아이들이 떼를 써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영화로 보여주었다. 집중하여 두 시간을 그리 빠져드는 걸 보면서 참 신기하였다. 어떤 즐거움, 또는 맛을 아는 것이다. 나는 뒤로 물러나 앉아 아이들의 집중을 시인의 고백과 연관지어 그리 이해하였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당장 뒤에서 왔다 갔다 하고 나는 여전히 딴 짓을 하는데도 일체 관심을 두지 않고 영화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보고, (현실을, 오늘의 사정을, 여러 근심과 걱정을) 알면서도 하던 대로 할 수 있는 집중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달다, 꿀보다 달다. 그 맛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늘 고단하고 바삐 움직이며 사느라 산다고 사는 이의 눈에는 나의 쉼이 이해가 될 리 없다. 때론 한심하게 여겨질 테고, 때론 부러워서 은근히 시샘도 날 테지만 그 쉼이야 내가 취한 게 아니었다. 쉼이 없는 수고는 허사라. 이를 위해 또한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속이 부대껴하니까 아내는 이번 일주일 내내 죽만 먹자고 하였다. 한데 죽이란 게 금방 꺼져서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이렇듯 우리 영혼도 먹어야 산다는 걸, 영혼이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날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얼마나 지겹도록 매 끼니마다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하듯 먹고 싸고 먹고 싸고 하는지. 하물며 영생의 삶에 이르는 길인데, 받아먹으라.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이를 위해 말씀을 읽는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행위는 묵상이다. 같은 본문을 붙들고 앞서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의 글도 유익하여서 저의 묵상이 나의 묵상이 된다. 우리는 같이 먹고 똑같이 주를 기념하는 사람들이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 11:24).” 이를 글로 써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고, 삶으로 옮겨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주를 기념하라.
대표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주일에 교회로 모인다. 각자 스스로의 삶을 주의 날로, 주일로 살다 주일에 모여 주 앞에서 기념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게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었다. 목사가 애쓰고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자들이 일을 할당 받아 수행하여서가 아니었다. 우리 안에는 모두 같은 주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그것으로 날마다 우린 ‘알고도, 하던 대로’ 주를 바라고 의지한다.
그러는 동안 나의 육은 죽고 나의 영은 살아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나 같은 게 뭐라고, 내가 말씀에 집중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면 말씀이 온통 나에게 집중하고 계시는 거였다. 그러자고 주가 죽으시고, 그러자고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들은 이를 기록하여서, 그러자고 오늘도 늘 ‘하던 대로’ 말씀 앞에 앉아 이를 바라고 구하게 하시는 것이다. 진리를 따라 가난하게 살게 하심이 그래서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곧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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