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가 선 곳으로 나왔는데 그가 나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다니엘 8:17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시편 12:1
햇살이 듣지 않는 창가는 추웠다. 종일 구름이 가득하여 금세라도 눈이 올 것 같았다. 설교원고를 수정하고 출력을 한 뒤 주보를 만들었다. 어김없이 한 주가 다 흐르고 주일이 다가왔다. 대학 때 동기들은 모임이 있는 날이어서 여러 장의 사진과 글들을 마구잡이로 올렸다. 얼굴은 알아보겠는데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다들 아줌마 아저씨를 지나고 있으면서 옛 그림자를 더듬으며 아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일찍 추위가 찾아왔다. 그리움은 종종 추위로 살을 에듯 안타까움으로 마음을 엔다.
사장 부친이 건너와 차를 한 잔 대접했다. 허물없이 이 말 저 말을 건네며,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하다 갔다. 해가 없는 오후의 그늘은 길었다. 다 나름의 산 날을 간직하며 늙어가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제가요, 그때는 말입니다, 제가 이래봬도, 하는 식으로 뒤를 돌아보는 초로의 겨울은 을씨년스럽다. 한참을 혼자 있다가 아이 셋 수업을 하였다. 말이 힘들어 입을 다물었다. 뭐라 하기 뭐해 컵라면도 끓여주었다. 친절은 가장된 선이다. 차라리 꾸짖고 야단을 쳐야할 일을 두고, 그런들. 나는 아이들에게 뭐라 할 마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싸리 눈이 흩뿌렸다. 물걸레질까지 하며 청소를 끝내자 등짝에 땀이 흥건했다. 주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단 한 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마음은 저 혼자 무거웠다가 또는 외면하면서 어수선하였다. 어떤 낙심 같기도 하고 서글픔 같기도 한 마음이었다. 자유롭게 나가서 옛 동무들도 만나고 싶고,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 깔깔 아무 생각 없이 놀다오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다.
주님은 이르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하늘의 보화가 먼저 있고 나는 주를 따른다. 내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두고 난 뒤의 일이다. 온전하고자 할진대 어수선한 마음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이것은 주의 은혜라. 을래 강가에서 나는 들었다. “내가 들은즉 을래 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환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하더니(단 8:16).”
간직하고 붙들어야 할 환상이라. 말씀에 기인하지 않은 마음은 무작위로 떠도는 꿈결 같아서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이 마음을 휘젓곤 한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 따위에는 관심 없다. “그가 내게 말할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매 그가 나를 어루만져서 일으켜 세우며 이르되 진노하시는 때가 마친 후에 될 일을 내가 네게 알게 하리니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임이라(18-19).” 그러므로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26).”
말씀을 주신다. 더러는 선명하여 금세 알겠고 더러는 희미하여 그 뜻을 모르겠다. ‘너는 이 환상을 간직하라.’ 단지 당대의 메대와 바사의 흥망성쇠만을 일컫는 게 아니었다. 여전하여서 그와 같은 다툼과 시기와 싸움과 분열은 끝이 없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 12:1).” 실제 그런 것 같이 기껏 믿음 생활을 잘 하는가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여럿이다. 한 친구는 너무 복에 겨워 그의 신앙은 헐겁다.
두 형님이 목회를 하고 작고하신 부친은 한 교회에서 평생을 헌신하시며 장로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도 모태신앙이라 어릴 적부터 교회 동무들과 어울렸던 터, 내가 뭐라 하면 또 그러려니 하면서 우습게 여긴다. 그러니 나 또한 다르지 않던 시절을 아는지라,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영혼을 두고 ‘도우소서.’ 기도한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두 마음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 주가 싫어하시는.
은총이 없어지면 어떤 선행도 가치가 없다. 의로움도 무가치하다. 명분도 실리도 모두가 거짓이다. 주의 은총으로만이 살 수 있는 생이 되었다. 이를 간직하라.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33:16).” 그러므로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40:13).” 다른 더 좋은 수는 없다. 나에게 더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 말씀을 붙든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12:6).” 오늘 본문은 이를 알아볼 수 있는 게 은총인 것을 확인시키신다. 내 안의 본성은 여전하여서 나는 세상과 벗하고 살았을 때를 종종 그리워한다. 마치 초로의 한 사내가 입만 열면 예전에는, 그땐 말이지, 내가 전에는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격이라. 내 안의 어린 여우라. 쉴 새 없이 뒤를 살피며 굽실거리게 한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주님이 나를 돌보시지 않으면, 나는 이 길을 갈 수가 없다.
예닐곱 명이 술잔을 기울이며 불그레한 얼굴로 사진을 찍어 보내오는 것을 보면서, 지나온 어느 시간이 너무도 까마득하여 아찔하였다. 순간이라. 저 오래된 기억은 손에 잡힐 듯 한 뼘이면 될 것인데 아득하여서 벅차다. 오빠, 오빠 하며 발랄하게 마당을 뛰어다니며 강의실을 휘젓곤 하던 꼬마 아가씨가 뚱뚱한 오십 대 아줌마로 앉아 있다는 이 착시현상. 한참 땐 문학을 노래하고 시와 꿈과 낭만을 운율에 적어서 별을 이던 날이었는데. 그 애는 목회자 사모가 되었다가 남편이 목회를 그만두면서 사모의 사역도 잃어버렸다. 한 잔 술에 모든 게 우습다.
우스워서 을래 강가에 앉아 슬피 운다. 먹고 먹히는 삶의 현장에서 젊음을 놓고 온 게 문제이겠나, 아니면 잃어버린 경건이 또 신앙이 문제이겠나. 나는 밤새 저들이 이차 삼차를 옮겨가면서 찍어 올린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들도 낮에 다녀간 사장 부친의 회환에 찬 목소리로 지껄여대고 있었을까? 왕년에는 말이지! 우리가 그땐 말이야! 하면서. 어느 사진을 보다 배시시 웃고, 어느 사진을 보다 울컥 그리움에 사무치곤 하면서. 산다는 일의 그 덧없음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결국 남는 게 무엇인가?
그럼 아버님도 이제 어머니 따라 신앙생활을 하셔야죠! 나는 말을 끊고 끼어들 듯 저에게 말했다. 처가 쪽의 신앙 내력은 굳건하여서 목사가 몇이었고, 장인이 모 감리교회 개척 멤버로 거의 평생을 장로로 살다 갔으며 그 자손들도 현재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하니 하는 소리다. 남이 이런데 저런데 하면 무슨 소용인가. 안 믿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끄달렸을 꽃다운 나이 때의 신앙 좋은 어느 처자를 생각하다 마음이 싸했다. 바로 동생은 사모가 되었고 내리 두 남동생은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기껏 사진 한 장이면 모든 걸 말해줄 수 있는 인생 앞에서 우리는 참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산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내가 살아서 남은 날 동안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주의 은총의 표적으로 그들이 보고 부끄럽게 하소서. 주는 나를 돕고 위로 하시는 이이십니다. 그렇듯 순식간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자기 교회 수련회에 같이 가자고 하며 믿음이 참 좋았던 어느 청년의 모습이 소주잔을 한 잔 들고 불그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교회는 다니나? 물었더니 그저 부질없다는 듯 풋, 하고 웃고 만다. 도대체 어디서들 다 잃어버리고 온 것일까? 이젠 뭐라 하면 나이든 자들의 고집스러움만이 단단하여서. 아버님도 교회 다니셔야죠! 하고 말을 끊었을 때 저는 허탈한 듯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허허로워했다.
그렇듯 누군 돌이켜 주 앞에 나아오고 누구는 이내 주를 멀리하며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어서, 아뿔싸. 오늘의 내 자리가 은총이었다. 나를 여기에 두신 데 따른 은혜가 과분하였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90:17).” 나는 이제 허허벌판 같은 아이들의 마음을 향해 걷는다. 아직 조막만한 어린것들을 상대로 기도하며 무슨 말을 어찌 이끌어야 할지 주께 아뢰고 또 구한다. 누가 어른 성도를 운운할 때면 나는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묵묵히 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밖에.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그와 같은 기도가 곧 은총이었다.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4).” 주만 바라고 주께 구하는 일 외에 다른 수를 알기를 원치 않는다. 곧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8:35).” 지혜란 그런 것이었다. 주를 경외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데 따른 긍휼하심이 복되었다. 나는 물끄러미 30년 전 친구들의 얼굴을 카톡에 올라온 사진으로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내게 두신 한 날의 수고가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 유독 지혜자는 은총의 값어치를 연거푸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 9:11).”
이를 가만히 알 수 있는 자리가 은총의 자리였다. 나는 사진 속 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네, 언제든 오세요. 하고 사장 부친을 배웅한 뒤 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다. 복에 겨워 그 복을 모르고 흘려보내는 이를 위하여, 나는 을래 강에서 내게 두시는 환상을 기억하였다. 비열함이 판 치는 세상에서,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시 12:8).” 나는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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