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다니엘 7:18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편 11:1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환상 속의 짐승은 기괴하고 무섭다. 각각 이어지는 강국을 나타낸다고 해설을 같이 읽었다. 바벨론, 메사, 바사, 알렉산더, 로마로써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하는 말씀 앞에 안도한다.
곧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26-27).” 승리는 이미 불을 본 듯 빤한 것이지만, 그러는 동안의 무섭고 떨림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더러는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조언을 일삼는다.
이번 주일 전하여야 할 말씀 본문으로 잡고 묵상하였던 내용과 중첩되어 그 의미가 새로운 것 같다. 이스라엘은 왕을 원했다.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삼상 12:12).”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심에 대해 못 견디겠는 것이다. ‘저들처럼’ 왕을 찾으면서 이유도 궁색하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8:5).”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볼 때 그 종국은 어찌 되는지 알게 하신다. 하나님도 이를 알고 계셨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 저들이 실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눈에 안 보이고 막연하여서 미덥지 않고 불안해서, 그러느니 사람을 섬기는 쪽으로 삼은 것이다. 왕의 제도가 얼마나 헛된지 사무엘은 설명해준다.
왕의 제도는 아들들이 끌려가 군사가 되고, 왕의 어거를 끌고 달려 호위하며, 복종해야 하고 딸들은 데려다 식모나 노예로 쓰고, 저들 밭과 소유는 왕의 것이 되며 그것에서 또 세를 내야하고, 노비로 삼음을 당해야 한다(11-17). 그럼에도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19-20).” 어처구니없게도 그 이유가 ‘다른 나라들 같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 어리석은 일 아닌가? 빤히 그럴 걸 알면서 당장의 일이 아닌 듯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 같기만 하였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18).” 그래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종종 아이들이 보이는 똥고집 같았다. 결국은 그렇게 하여 사울이 첫 번째 왕으로 세워지고 다윗과 솔로몬에 이어 왕국은 둘로 나뉘고 500여년을 이어오면서 여러 왕이 세워졌다 사라지면서, 이내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진다.
왜 하나님은 극구 막지 않으시는 것일까? 홍해를 건너 광야 40년의 세월도 그랬던 것처럼 길고 긴 우리의 그릇된 선택의 길을 지나서야 비로소 참 왕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게 하시는 것이니. 그러는 동안 괴물과 같은 기괴한 왕국이 생겨나 공격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면서 그 선택의 값이 너무 혹독하다.
중3 아이가 오기 전에 초안을 잡으며 메모를 한 것이라, 아이가 쓴 글을 보면서 실제 그 아이의 선택에 따른 오늘을 내일에도 수없이 많은 오늘 앞서 서야 하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듣기 싫어도 어쨌든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과정 동안 공부를 안 해서 오늘 인문계를 가네 못 가네 하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곧 가깝게는 또 3년 뒤에 대학을 가네 못 가네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고, 그와 같은 일은 사는 날 동안 계속 되면서 결국 너의 선택을 네가 딛고 살아야 하는 일이다. 주일에 왔으면 하는 마음을 두고 그리 에둘러서 설명하였다.
그럼 결국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의 의지로 가능할까? 사람들의 철회와 반성으로 온당해질 수 있는 문제였을까? 수고하고 애써 인내하였으면 좀 나아졌을까? 바르게 잘 선택했으면 될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걸 성경은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성령이 붙드시지 않으면, 일을 행사하지 않으시면 모든 게 헛되고 헛됨을 일찍이 솔로몬은 구슬프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그러니 아이에게 그리 설명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오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이와 같은 말이 귀에 들리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청산유수 같이 설명을 잘한들, 아이가 아무리 명석하여 하는 말을 다 이해했다고 한들,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인데. 그래서 나는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부모에 대한 미움이 있었고 나름 완전한 줄 알았던 저들의 그릇됨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에서의 혼란이 아이를 어렵게 하였다. ‘가장 힘들 때와 가장 행복할 때’를 주제로 글을 써보게 하고 이를 가지고 대화를 했다. 둘 다 그 중심에는 부모가 있었다. 같이 여행을 갈 때 행복감이 들지만 같이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때 힘들었다. 단순하게는 그런 것인데, 무엇이 아이를 자꾸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일까? 나는 아이의 어눌한 자기변명을 들으면서 생각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한참 감당이 안 되는 나이지만 실은 평생을 그러고 사는 게 인생이다.
나의 존재의 중심에 구주가 계시지 않으면 내 안에 마구잡이로 생겨나는 괴기스러운 주권자가 얼마나 많은지. 수시로 또 빈번하게 나를 통치하려 드는 나의 어린것들의 속절없음에 대하여 주의 긍휼하심만이 살 길인 것을, 아내와 같이 가정예배로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생각하였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곧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9).” 주가 나의 왕이시라. 하나님이시라. 주의 통치만이 내가 살 길임을, 하나님은 그 오랜 시간을 두고 참고 기다리시며 깨닫게 하려고, 알게 하시려고 직접 낮고 천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손수 사람의 왕이 되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곧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궁극적으로는 저가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부활 승천하셨고, 영원한 본래의 우리 구주, 우리의 왕이 되셨다.
이를 직접 현장에서 역사로 살다간 무구한 사람들과 달리 오늘 나의 처분은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감사할 일인지. 그리하여 더는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오늘 나에게 말씀을 주시는구나. 말씀이 귀하다. 새삼 내게 은혜가 참 크다. 생으로 살다간 이들의 저 속절없음에 대하여는 나는 그저 두렵기만 하다. 살아서 살아야 사는 걸 알겠다는 이에게 내가 느끼는 두려움도 같은 것이다. 살아봐야 안다는 말처럼 허망한 게 또 있을까? ‘철들자 노망난다.’는 말처럼, 나는 그래서 좀 더 일찍 우리 아이들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와 같은 말씀의 진리를 깨닫기를 위해 기도한다.
딸애가 오래 두고 기도하였던 전도사 사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이끄심을 두고 말하였다. 동기가 어느 교회에 추천을 했던 모양인데 어찌어찌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는 담임목사가 당장 내일모레 토요일에 좀 만나봤으면 한다는 연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하고 내게 묻는 걸,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는가 보자. 하고 말해주었다. 하나님은 결코 성급하지 않으시고 속절없으시지 않다. 이를 느끼고 그리 사는 건 사람의 고집일 뿐이다. 자꾸 우리 교회 사정을 두고 생각할 건 없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가 앞으로도 가장 선하게 이끄실 것을 믿는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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