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요나 2:7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을 오래 되새겼다. 그것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하다못해 집을 드나들 때도 문단속을 하는데 마음의 일이야 어찌 경솔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가령 아이들을 귀히 여기면서도 아이들이 참 싫다. 되바라지고 억지스러우며 제멋대로 구는 것을 참아야 할 때면 욕지기가 목구멍에 걸린다. 내가 덜 된 사람이라 나만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꼬맹이들 여덟 명이 연속으로 오는 날이었다. 특히 앞서 오는 아이들은 너무 어려 초딩 3학년으로 아내가 같이 와 있지 않으면 나는 혼자서 감당이 안 된다. 통제하고 싶고 억압하고 싶은 것이다. 다스리고 싶고 관여해야겠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욱, 하고 올라오는 걸 나는 어쩌지 못하겠다.
그걸 또 뭐라 잔소리를 했더니 아이들 몇이 뚱해서 돌아갈 때는 뒤도 안 돌아다보고 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한심한 것 같기도 하고 서러운 것 같기도 하고. 구걸을 하듯이 오라오라 하는데, 순간 하나님이 나를 향하였던 마음이셨지 않나?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아 6:13).”
주일에 나오기를, 하나님 앞에 올라와 함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3).” 하는 자의 자리에서 부르고 기다리며 또 참아야 하는 일이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래도 아이들이란 단순하고 순진해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것이 당혹스럽다가도 아이 안의 결핍을 생각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처지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내가 좀 더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의연하고 느긋하여 푸근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와 정반대이니, 늘 조바심에 안달하고 나 혼자 시무룩하였다가 기대도 하였다가 풀이 꺾여 낙심도 하였다가.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나는 정말이지 이 일이 싫어서 마음이 어려웠다. 짜증도 나고, 아무리 애써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아서 기진하였다. 소파에 드러누워 무심하려니까 그게 더 고역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이 은사가 내게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7-8).”
말씀 안에 길이 있었다. 우선은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서다. 그럴 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의연하고 내가 너그러워서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보다 옹졸하고 얄팍한 위인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럴 때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시름하고 우려하여 염려로 뒤트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었다. 곧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일’이란 이로써 답이 나온다.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그 사랑은 내 마음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이를 감당하는 나의 수고가 절제이겠다.
너무 바라지도 말 것이고 내가 나서서 무얼 어떻게 하려는 마음이 앞서지도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절제다 절제. 하고 싶은 말도 절제하고 뭐라 꾸짖고 간섭하고 싶은 마음도 절제가 필요하였다. 어쩌면 나는 내가 그리는 그림으로 아이들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아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은 내 안에 만족을 추구하려고 말이다. 보람을 찾고 긍지를 얻으려고, 내 수고의 값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에서도 절제가 맨 나중을 버티고 있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아홉 가지 열매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절제가 뒤를 받치고 있어서였다. 절제가 없이 넘치는 사랑은 간섭과 참견이 되어 급기야 집착과 애증이 되기 십상이다. 절제가 없는 희락은 쾌락에 빠지게 되고, 절제가 없는 화평은 자기만족을 그리 여겨 자기애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절제가 없는 오래 참음은 자기 기준을 강화할 따름이며.
절제가 없는 자비는 그 자체로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겠고, 정제가 없는 양선은 암암리에 자신의 공적을 높이 세우는 결과를 낳으며, 절제가 없는 충성은 무모한 가신으로 전락시키고, 절제가 없는 온유는 무분별하게 방기하는 것으로 그친다. 여기서 절제 또한 절제가 없을 때 인색하고 옹졸한 사람이 되게 한다. 내가 어쩌면 어제 느낀 마음은 사랑도 희생도 아닌 그야말로 짜증이었다. 기껏 잘한다고 잘하려고 나는 진심을 다하는데 아이들이 이를 농담으로나 여겨 시시덕거리니까 화가 난 것이다. 내 기준에 못 미치는 반응이어서 말이다.
그럼 예수님은 그런 나 때문에 어떻게까지 하셔야 했었나?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나는 지난 날 내가 어떠하였는지 잘 안다. 그럼에도 그런 나를 위하여 주께서 당하신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얼마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렇듯 술술 풀릴 문제였으면 죽으시기까지 살아나셔야 할 필요가 있었겠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주의 신음하는 소리가 나로 인한 것이었음을.
그렇구나. 피흘림이 없이는 사하심도 없는 게 우리의 허물이고 죄악이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아이라고 그것이 온당하겠나? 저들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였다. 교회에 나오라는 게 마치 구걸하여 적선을 구하는 것처럼 비굴하게 여겨지다가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아이들도 스스로는 감당이 안 되는 문제여서. 이를 짜증만 낸다고 될 일도 아니어서. 그 값어치를 알기란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그러니 이 일을 어쩐다? 나는 내가 하려고 할 때마다 영락없이 좌절한다. 화부터 나고 짜증부터 올라온다. 이런 애들을 데리고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다. 오든가 말든가, 하고 고개를 저으려고 하면 내 안에 먼저 뜨거운 것이 일어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기분 나쁜 일 있었어? 하고 아내가 묻는데도 뚱하니 말대꾸도 하기 싫었다. 애들이 싫어, 사람들을 바라는 게 싫어, 내가 너무 싫어! 하는 말은 참으로 공허하여서 안으로 삼킬수록 헛헛하였다.
아, 그러면 그럴수록 이같이 큰 구원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3).” 내가 저 아이들로 쩔쩔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내가 그리 받은 자이어서 그렇겠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면 될 일인데, 어찌 말로 표현하기 힘들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 같아서 말이다. 나는 외면하려 해도 내 안이 한 영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못하게 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1).” 아, 이를 가벼이 여길 때 오히려 큰일 나겠구나. 그러니까 내가 애들 때문에 볶이는 게 오히려 나은 것이구나. 이럴 거면 오지 마! 하고 말했다가 그게 또한 마음에 걸려 혼자 애태우던 것도 그래서였다. 유념하여야 한다. 자칫 흘러 떠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절제함으로 마음의 허리를 동여야 하는 일이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2-4).” 성경이었다. 그래서도 말씀을 붙들고 이 구원을 확증한 바 된 이들의 그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능력으로 성령을 나누어주신 데 따른 증거를 삼아야 한다.
어떻게 내가 좀 해보려고 해서는 어림없는 일이어서 나는 아내의 잔소리에도 아이들 줄 간식을 사고 그것을 나누어주며 얼레고 달래 또 위로가 모자라지 않도록 씨름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글방 선생으로 그치는 행위 이상의 것이 요구되었다. 썩지 아니할 그 무엇을 위해,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맞닿아 있는 요나의 기도는 그런 셈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 것인가? 내가 주를 생각하는 일.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묵상하는 일. 그러할 때 내 기도가 주께 이른다. 주의 성전에 미친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결국 내가 어떻게 잘해보려는 것까지 내어놓게 하시는 하루였다. 거기서 짜증이 나고 투덜거리는 심보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피곤할 때에 주를 생각함이여,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0) | 2018.01.20 |
---|---|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0) | 2018.01.19 |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0) | 2018.01.17 |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0) | 2018.01.16 |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0) | 2018.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