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 1:3-4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43:3
새벽 4시, 아이의 문자 소리에 깼다. 전날에 대학은 어찌 됐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던 것에 대한 답이었다. 진동에 놀라서 잠이 달아나고 앉아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따 늦은 오전에서 만나 이른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지난 가을에 ‘자소서’를 같이 준비했던 아이는 모 대학에 콘텐츠학부가 되었다. 덩달아 생각이 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 하다 그냥 두었다. 밤낮이 바뀐 아이는 지금 이 시간에 지난 드라마를 본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였다.
아이엄마는 단지 논술 때문에만 보낸 게 아니었다고 울먹거렸다.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와서는 하는 게 없고, 그런데 돈만 받는 것 같아 계속 오는 게 무의미할 것 같아 그만하자고 했던 게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히치코모리’까지는 아니라 해도, 스스로 왕따를 자청하여 대화는 단절되었고 일상생활의 대부분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늘어져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혼자 놀기’ 또는 ‘시체놀이’ 등의 표현이 어울리는 상태.
획일화된 교육과정과 서열화 된 입시경쟁이 불러낸 이 시대의 폐단아. 가족 간의 오해와 반목이 자아낸 벽 없는 감옥의 나날들. 의욕 상실의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은 ‘몰라몰라 형태’의 외면과 방치의 연속. 뭐라 한들, 그 무엇도 동기부여가 되기 어려운 무감각의 시간들. 이름 하여 ‘따귀 맞은 영혼’의 상처를 어찌 보듬어야 할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난감하기만 하여 슬그머니 관심을 놓는, 비겁함으로 외면하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또 떠오르는 아이가 있는데 학교는 결국 자퇴를 했는지, 폭식으로 인해 몸무게가 얼마나 더 늘었는지, 여전히 밤낮이 바뀐 채 약물에 의존하고 있는지. 나는 한참 마음이 어렵다가도 이내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찍 일어나 앉아 나는 난감하다. 오겠냐고 했을 때 이 아이는 온다고 하니까 그나마 다음 수순을 두고 주께 간구할 것이 있다. 저 아이는 그저 너무 멀다고 하고, 뭐라 하면 대꾸도 없어 뭘 어쩌지도 못하는 것이었는데. 도대체 이 일이 어째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오늘 말씀 앞에 묻는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스스로 속이는 삶이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에이 몰라, 하면서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스스로의 보금자리라.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당최 아랑곳하질 않는다. 문제의식이 없다. 그리고는 스스로 애쓴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스스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순간에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오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숨 호흡을 하며 다시 읽었다(옵 1:3-4).
스스로에게 속는 삶이라니, 이것이야말로 교만이었다. 그게 자기연민이라 해도 또는 어쩔 수 없는 좌절의 늪이라 해도 그처럼 자신을 방치하며 놓아버리는 순간, 그 영혼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엉겅퀴만 극성을 부릴 터. 갈등이란 게 본래 칡나무 갈(葛) 자에 등나무 등(藤) 자를 써서 얽히고설킨 상태다. 이를 어쩔 수 없어 스스로 힘에 부쳐 방치한 채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은둔형 외톨이의 정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다 그렇게 굳어져 시간을 탕진하고 의식을 허비하면서도 스스로를 내버려두는 상태.
아,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내 안에 주시는 마음에 끌려, 이따 낮에 올래? 하고 물었고 네! 하고 답이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희망은 희망일 텐데. 보통은 그러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한 녀석은 것도 귀찮다. 너무 멀고 성가시다. 그러느니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대단히 피로감을 호소한다. 그러니 어쩐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 주께서 저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심을 잘 압니다. 나 같은 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늘 다그치다 쓰러져 낙심하는 게 고작인 것을 압니다. 나는 주께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병들어 있다. 의욕상실의 시대다. 가치관 부재의 나날이다.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 졸리면 자고 깨어나면 무기력한 즐거움만 찾는다.
그런 상태의 아이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덩달아 늘어져 자꾸 잔소리만 하거나, 참견을 하거나 것도 아니면 방치한 채 나 몰라라 하는 수밖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어떻게 내가 변할 수 있었는지 되짚어보면 답이 있겠다. 나의 우울감은 병적이다. 막연한 느낌이나 감상이 아니다. 아이의 상태도 질환의 일종으로 병에 걸린 것이지, 그저 그럴 수 있는 막연한 게 아니다.
등이 꺼진 것이다. 어두움의 상태다. 눈은 떴으나 청맹과니다. 보이질 않는다. 처음에는 두렵다가 나중에는 편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빛을 싫어한다. 눈이 부시다. 그러느니 제 눈을 감아버린다. 안 보면 그만인 줄 아는 것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낙심하여 도로 물고기 잡으러 갔던 베드로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와 같은 어둠에서 헤어 나오는 길은 하나뿐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곧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야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말 한 마디면 되었다. 나는 그랬다. 별 수 없이, 더는 어쩔 수가 없어서 주님, 도와주세요! 했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흘렀고, 의도한 바 아닌데 고백이 나왔으며, 비로소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니까 저런 상태는 그 어떤 도움도 굳이 바라지를 않는다. 눈을 감아버렸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본래부터 내 안에 있던 소망이다.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외면하고 부정하던 것이다. 이제는 이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다. 나보다 자기애가 강했던 이가 또 있을까? 모든 걸 외면하고 부정하였던 것은 그것을 다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가질 수 없자 부정하는 게 편해진 것이다. 이를 어떻게 지나올 수 있는가 누가 묻는다면,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것뿐.
그리하여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내가 저 아이를 욕할 수 없는 것이다. 안타까움은 정당한 내 안의 반응이다. 나도 거저 받은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로 하여금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말이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8).” 하나님이 날 위해 죄인이 되셨다. 십자가를 지셨다. 이는 결코 낭만적인 내용이 아니다. 끔찍하고 참혹한 일이다. 마치 십자가를 무슨 위안의 정도로 또는 새로운 신봉의 대상으로, 모셔 두려는 ‘사울의 법궤’처럼 전쟁터에 끌고 가려는 따위의 미신적인 자기만족이 아닌 것이다.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눈 감음’이 히치코모리다. 스스로 은둔하는 외톨이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 같으나 실은 너무 사랑하는 애착이다. 증오다. 자기에게 하는 분풀이다. 쌓인 노여움이다. 이를 한사코 외면하는 것 같으나 실은 보복의 시간이다. 사랑 받지 못한 데 따른 보상이고 희구하던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앙갚음이다. 아이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또 해결이 될까? 길은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길이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주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를, 함께 하심으로 아이의 감은 눈을 뜨게 하시기를.
나야 그저 받은 것을 전하는 것뿐이겠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나의 죄를 위하여 죄인으로 죽으시기까지 한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알게 할 수 있을까? 자다 말고 아이 문자에 이따 올래? 하고 답을 보내놓고는 잠결에도 그런 내가 이상하였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네! 하고 답이 온 것이다. 여기까지 성령이 하신 일이라면 그 나머지도 주가 이루어 가실 것을 신뢰하며. 나는 다만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
그게 나였음을.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주는 응답하셨고 돌이켜 오늘에 두신 일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내 안에 저 아이에 대해 또한 다름이 없었던 나를 돌아보아 저 아이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데는 다 그게 증거였다. ‘사랑함으로.’ 비록 나의 마음은 보잘것없는 것이겠으나 그것으로 부디 주의 사랑이 전하여질 수 있기를.
그러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것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정하고 멀리 떠났던 이가 하는 고백임으로 더욱 진실 되다. 그러했던 베드로 사도는 오늘 내게 권하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더욱 힘써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러니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곧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 힘내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0) | 2018.01.18 |
---|---|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0) | 2018.01.17 |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0) | 2018.01.15 |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0) | 2018.01.14 |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0) | 2018.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