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전봉석 2018. 1. 17. 06:59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편 44:6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건 다 알면서도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능청을 떠는 것이다. 설마, 하면서 뒤로 물러나고 싶은 까닭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는 자기 생각으로 일을 모색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두둔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아담이 물려준 위대한 자기 모면의 술책이다. ‘너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 때문이다. 모든 변명은 원망을 품고 원망은 불순종에 따른 자기보호의 기제다. 유난히 부산하고 마음이 어려운 하루였다.

 

아이는 약속을 지켜 제 시간에 맞춰 왔다. 그런데 아이아빠가 인천까지 데려다주었다는 말에 나는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무슨 말에든 너무 ‘더디 믿는 마음’에 대해 조금은 답답증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허물은 결국 어쩔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니 어찌 견딜 것인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그러는 중에 신대원 동기들 방에 서른아홉 젊은 목사의 위독하다는 소식이 올랐다. 췌장암이라는 소식에 안타까움으로 마음을 담아 기도 중이었는데,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전언이었다. 주님 살려주세요. 그 생명을 연장하여주세요. 나는 아직 어린 자녀들과 사모를 생각하며 단순한 마음으로 아뢨다. 어떤 두려움이 조바심처럼 내 안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구하여야 할지 몰라서 살려주세요, 하는 나의 마음은 송구하였다.

 

아이가 도착하기 직전 누구와 통화를 하였고, 저는 어디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실은 그러는 시늉으로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돈돈거리는 남편 목사의 철딱서니 없는 등살에 궁여지책으로 그런 시늉이라도 하는 것인가 본데, 그러니 어디 일반 직장을 구하려고 하니 그게 되겠나? 나는 안 믿는 사람들의 문화가 어떠한가를 염려하며 사모가 그런 일터에서 경리로든 행적일로든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해주다 그저 답답하였다. 오죽하니 그러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아이와의 대화는 기름을 쥐는 일처럼 힘에 겨웠다. 스물하나. 그 아름답고 꽃다운 나이에 왜 그처럼 스스로를 처박아두고 시들한 것인지. 그래도 한 달에 서너 번 집 밖을 나온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죽어도 ‘히치코모리’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밤낮이 바뀌었으니 가족 간의 소통이나 왕래가 어떠할지도 빤하고, 것도 오죽하니 그 부모가 차로 인천까지 데려다주고 갔을까. 모처럼 선생을 만나러 나간다니까 말이다. 그 심정이 살얼음판이라. 재수에 이어 다시 삼수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무런 목표도 계획도 없이 올해는 공부를 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생사를 갈림길에서 그 절박함이 간절하여 주께 살려주세요, 하는 기도밖에는 달리 드릴 게 없는 다급한 상황과 철딱서니 없는 신랑 목사의 투정에 못 이겨 어디 일자리를 구하려고 길을 배회하고 있는 처지와 갈 바를 몰라 은둔형 외톨이를 자처하고 있는 스물한 살 다 큰 계집아이의 잠투정 같은 한가로움에 내 속이 다 터질듯하였다. 참으로 가지가지라. 곁을 같이 하고 있는 사무실 부친은 늘 아침이면 차 한 잔을 같이 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데, 늘 돌아보며 ‘모든 된 일’을 회생하는 말만 되풀이 할 따름이다.

 

다들 잠잠해진 오후, 초딩 5학년 아이까지 수업을 하고 간 다음에 나는 문득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생각하였다. 슬픔에 빠진 이들의 특징은 동일하였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 24:13-14).” 저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일까? 그랬었지? 하면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셨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어쩌면 저의 놀라운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얘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 예수께서 붙잡히던 밤의 이야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이야기 등등.

 

정작 저들의 이야기에는 예수는 없었다. 그 부활은 없었다. 회상만 있고 과거만 있을 뿐이다. 누구는 길게 늘어지는 자신의 사연에서 그 모든 된 일에만 열중하여 푸념이다. 한탄이다. 서러움이고 원망만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교를 간다고 하면서도 그 흥분은 현실도피일 뿐이다. 아이의 구구한 변명은 말할 것도 없고, 곧 칠순을 코앞에 둔 부친의 말은 늘 ‘그랬었지!’ 하는 회상으로 달려간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5-16).” 그러는 동안 예수께서 동행하고 계신데도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하였다. 눈이 가리어진 까닭이었다. 서로의 말을 들어봐야겠으나 누구의 말만 가지고 보면, 먹고 사는 문제로 목사라는 사명은 퇴색한지 오래다. 한쪽은 자신이 돈벌이를 하고 있으니 너도 나가서 돈 좀 벌어오라는 것이고 한쪽에서는 부교역자 사례비가 얼마나 된다고 그 위세를 떠나 싶은 것인데, 그와 같은 설왕설래가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아이와 같이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또한 아이가 돌아가기 전에도 나는 기도하자, 하고 주께 고하였다. 무슨 생각으로 아이는 ‘아멘’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서너 시간 아이와 나누었던 이야기로는 감당이 안 되어서 말이다. 그냥 오는 데 의미를 두고(!) 아이더러 주일에 나오라고 했다. 평일에 하루씩 이렇게 와서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오라고 했다. 아이는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두고 궁싯거렸다. 부친은 ‘이 모든 된 일’에는 말이 많으면서도 정작 복음에 대하여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결국 예수께서 말을 거셔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7).” ‘이르시되’ 하고 우리들 말을 끊으셔야 한다. 서로 주고받는 말이 무엇이냐? 같이 동행하는 동안 다 들으셨으면서도 예수님은 그리 물으신다. 그러자 저 둘은 슬픈 빛을 띤다. 주거니받거니 나누던 자신들의 이야기에서 물러선다. 말이란 좀 그런 것이어서 말 속에 함정이 있다. 말은 하다보면 말이 말을 낳고 보태고 더해져 말만 풍성하여진다.

 

스스로의 말에 도취된 사람은 슬픈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변명이다. 아이의 궁싯거리는 말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변호이고, ‘아버님’의 호탕한 너스레 역시 자기 이야기로만 점철된 완고함이다. 누구의 구구한 하소연은 듣다보면 안타깝기보다 짜증스러워질 정도로 칭얼거리는 아이 같다. 그런 사람인 줄 알면서도 결혼을 했고 덩달아서 안달복달 못하면서도 ‘주의 일’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듯 어디 먼 곳의 선교며 그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마음을 둔다. 현실도피의 가장 단순한 논리가 먼 산을 가꾸는 일이다.

 

‘이르시되,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실 때, 우린 아주 하찮다는 듯 되묻는다. 글로바가 말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나름은 현실적인 사람인 것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사람을 보았나? 예루살렘에서 살았다면서 아니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모르나? 하고 되묻는 것이다.

 

저의 구구한 설명은 다 알고 있었다. 부활에 대한 증언도 들었다. 정작 그 부활을 알지 못하니 주변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남 이야기하듯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19-23). 오늘 본문 요나서에서도 나는 새삼 저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릇 행하였다는 데 놀란다. 저는 주의 낯을 피해 욥바로 내려갔는데 ‘마침, 만났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항상 우리의 항변은 마침, 그러한 경우에 안도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마침 선교를 가는 팀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무슨 계시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나는 차라리 그 선교 나가는 일을 접으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몇 박 며칠에 백오십만원이다. 이 무슨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마침 아이엄마는 좀 더 시간을 벌어도 되니까 공부를 한다는 데 의를 두자고 하였단다. 늘 우리 앞에는 그 숱한 ‘마침’이 도사리고 있다. 때론 그것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데 유용하다.

 

결국은 특단의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 우리의 악함은 스스로를 악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정당하게 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로 일관하게 만든다. 최후진술마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변명으로 채워진다. 무슨 악순환 같다. 기어이 장자가 다 죽고 난 뒤, 그 큰 슬픔에 빠져서야 알 수 있는 것일까?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그때도 주의 은총이 아니었으면, 다음 이야기는 없었다.

 

아, 그래서 누구보다 미련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미련하여 더디 믿는 것인지, 더디 믿으니 미련한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내가 지금 누구 흉을 보려는 게 아니라 저게 바로 나였는데도 말이다. 나야말로 더디 믿어 미련하였다. 너저분하게 널린 게 많은 삶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상처 받기 쉬운 마음으로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며 누구보다 우울감에 쉬 젖고 아닌 척 하면서도 항상 남과 비교하면서.

 

나의 미련함에 대하여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주님이 이르신다. 참 미련하다. 모든 것, 곧 말씀을 더디 믿는다. 감상적이어서 그렇다. 자기위주여서 그렇고 그 속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어서 말이다. 서로의 연민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더딘 이유가 다 핑계로 돌아간다. 끝도 없는 변명이 이어진다. 서너 시간에 걸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누구와 통화에 이어 카톡을 주고받으면서도 분명한 건 끝도 없는 자기 항변이었다. 뭐라 하면 손을 휘휘 내젓는다.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일갈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3).”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자기연민에 빠지지 마라.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낭만적인 접근은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다. 그런 와중에 선교를 다녀온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답답한 노릇이었다. 아이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돌아갔고, 누구는 선교만 가면 다 해결될 줄 알고 그 날만 손꼽아 기다렸고, 부친은 너스레를 떨다가도 복음 앞에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신하여.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자꾸 남편 목사의 이런저런 안 된 사정을 운운하고 아들애의 저런이런 안쓰러움에 목 놓아보지만 실은 그게 다, 그래서 자신은 어쩔 수 없다는 소릴 하려는 것이다. 근신은 따로 떼어놓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어떤 문제들 가운데서, 떼어낸 자신의 이야기만 보는 것이다. 다 같이 잘 되자고 구원을 운운하는 것만큼 난센스는 없다. 비로소 알아야 할 것,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시 44:6).”

 

나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다. 나도 나를 어쩔 수 없는데 내가 누굴 위해 구구절절 변명으로 일삼을 것인가. 결연함이 필요하다. 내 활이 아니었다. 내 칼도 아니었다. 저것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6).”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위독하여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 간 동기 목사나, 잠이 몰려오는 아이의 늘어지는 하품이나, 계속 신랑 이야기 아이 이야기로 자신의 변명을 둔갑하는 누구나,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는 노인네나, 그 어떤 수고로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