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미가 1:2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4
세상은 본래 우상숭배로 가득하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우상숭배로 삼는 경우도 허다하니, 그 유익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하면 마찬가지이다. 그 표면적인 인물이 사울이 아닌가 싶다. 저는 경건하여서 전쟁에 앞서 스스로라도 제사를 드렸다. 전장에도 주의 궤를 끌고 나갔고, 군사들을 금식시켜 성결을 도모하였다. 미신적인 행위로 주를 바라는 신앙은 모두 우상숭배이다.
길일을 따지고 운수를 운운하고 자동차를 또는 유행하는 명품을, 보석을, 그로 인한 자기만족과 사람들의 이목을, 자녀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모두 그러하다. 그래서 자기 신념보다 무서운 신앙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내와 딸애와 모처럼 영화관에 갔다. 몇 주 전부터 보았으면 했던 <1987>을 보았다. 아내와 나는 87학번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였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보기 싫은 마음이 같이 일었다. 그때 그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전하여서 또 늘 그래 오던 이야기여서 말이다.
그랬던 이들 가운데 누구는 도로 저쪽에 서서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그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마음이 더 어려웠다. 저마다의 우상 가운데 ‘사람’보다 더 무서운 숭배가 또 있을까? 어떤 명령 앞에서도 ‘받들겠습니다.’ 하는 대답이 나는 두려웠다. 우상은 별 게 아니다. 항상 마음이 기울고 관심을 쏟는 게 숭상이다. 악한 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선한 쪽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더욱 두려운 것은 안 믿는 이의 것보다 믿는 이의 자기 숭배가 더욱 끔찍하다.
그땐 그랬으나 지금은 달라졌는가? 좋아졌다고 하는 표현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딸애에겐 그저 막연하여 모호할 따름인 것이다. 앞서 우리의 선조는 더더욱 처절했으며, 이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오늘 이 시대의 것이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각의 사연과 사연이 모여 자기 아집을 형성하고 구성원의 집결을 도모하며 가치를 구현하고 이상을 볼모로 하여 현재의 굴종을 강요한다. 받들겠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자리에서 펼쳐지는 온갖 신음하는 목소리의 절규가 응축된 함성이 아니었을까?
저들은 저들의 명령을 받들고, 이들은 이들의 희생을 받들고. 받들고 받들어서 충성을 다하는 동안 여전하여서, 공수가 바뀔 때마다 저들은 저들의 가치와 기준을 받들고 이들은 이들의 가치와 기준을 받드는 것이니. 기구하다. 참으로 기구하다. 아내는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그랬었어, 그랬었지, 하는 감탄이 오늘을 비교하려 들면 곤란하다. 나는 자꾸 헛도는 바람처럼 마음이 휑하여 쓸쓸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말이 없었다. 뉘우침이나 아쉬움이 사람을 바꾸지는 못한다. '회개는 율법을 전제로 한다.' 말씀 없는 반성은 공허할 따름이다. 본래 사람은 그런 것이다. 누구나 생각은 하듯 누구나 미안함도 갖는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본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미 1:2).” 주가 증언하신다. 성전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5).” 갈리고 뜯겨, 새로 형성한 가치와 기준이 다를 게 없다.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3).”
공히 받들어 섬기던 것에서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매시대는 그 시대마다 여전하여서 부패한다. 어느 시대의 것을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이나. 성스러움을 따지고 가치와 기준을 언급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4).” 부질없다. 하나님 아닌 그 모든 것은 가치가 없다.
나는 동기들 방에 올라온, 췌장암으로 응급실에 있는 목사 사모의 기도문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하였다. 저는 로마서 8장 37-39절 말씀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직 어린 아들아이 사진이 같이 올라와 있었다.
‘주여 이 어린 삼남매를 어찌하시겠습니까. 부디 부디 살려주세요.’ 하는 젊은 사모의 눈물겨운 기도가 가슴 저렸다. 그 명령이 어떠하든지, ‘받들겠습니다.’ 하던 영화 속의 복창과 오버랩 되면서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 대화창의 화면만 응시하였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생을 살다가면서, 과연 나는 ‘받들겠습니다.’ 하며 주 앞에 부복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하는 말씀 앞에서도 먹먹하다.
결국은 우리의 의지로는 안 된다. 나름의 이상과 꿈만으로는 안 된다. '율법 없이 회개는 없다. 율법 없이 복음은 없다.' 삶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 없이 그 삶은 가치가 없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우리를 건지실 이는 예수뿐이시다. 그러려고 오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율법은 어떠해도 내가 죄인인 것을 정죄한다. 모든 걸 지키고 또 선히 산다고 해도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속량해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69).”
그 몫이 지독하리만치 개별적인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어렵다. 누군 받들고 누군 외면한다. 받드는 자의 자기 의견은 통하지 않는다. 어떠하든 ‘받들겠습니다.’ 하는 것이 충성인데, 이것을 내 의지로 운운하는 자체가 이미 그릇된 것일 수 있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 ‘받들겠습니다.’ 하는 복창이 염장을 질렀다. 그럼에도 그게 또한 주의 마음이어서, 우리를 속량하시는 데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창도 그 안에서 구원의 뿔을 이루셨다. ‘장래의 노여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부디 생의 어느 지점에서 맞닥뜨리게 될 고통의 경중을 떠나 주의 뜻만을 ‘받들겠습니다.’ 하는 우리의 충성은 가능한 것일까? 주께서 이를 대신하여 우리를 속량하셨다. 우리는 너무 연약하여서 살려주세요, 하는 기도밖에는 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주를 바란다.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마음이 착잡하고 또한 안쓰러워서 나는 주 앞에 가만히 앉는다. 뭐라 일러 아뢸 수 있는 말도 없다. 젊은 사모의 심정을 헤아려 알 길이 없어서 말이다.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간, 고문을 당하다 죽은, 숱한 무지렁이 같은 목숨과 목숨을 안타까워하다, 가없어 먹먹하였다. 죽기 전까지는, 아니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계속 되풀이 될 일이어서.
그런 세상과 화목하시려고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9).” 죄를 내게 돌리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읍하고, 나아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이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복창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내 안에 이는 서러움과 원망이 주께 향한 게 아니기를. 마치 무엇을, 어떤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악다구니를 써보지만 분명한 진리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21).” 하나님이 그리 죽어주셨다 것. 이에 오늘의 내 슬픔이 또 고통이 어떠하든지, ‘받들겠습니다.’ 하는 충성이 이내 나를 주장하게 하시기를. 나를 위해 대신 맞고 고난당하신 이의 뜻을 말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4:4).”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젊은 사모를 위해, 그 세 자녀를 위해 기도한다. 부디 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더욱 크고 위대하신 주의 은총 가운데서 잘 이겨내고 잘 견뎌내기를. 이를 어떻게 하면 비로소 기다릴 수 있는지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곧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9).” 곧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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