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전봉석 2018. 1. 22. 06:55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미가 2:13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주를 바라는 마음은 아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인내하게 한다. 저가 그 가정에 ‘길을 여는 자’로서 ‘그들(가족들) 앞에 올라가’는 걸음이다. 두 아이가 그래도 반응을 보였다. 오려고 했는데 한 아이는 알람을 못 듣고 늦잠을 잤다고 하고, 한 아이는 아무래도 화요일에나 오겠다고 문자를 주었다. 전에 같으면 그냥 씹고 말았을 텐데 그래도 뭐라 대꾸를 한 것이다.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기를 우린 늘 기도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딸애는 놀아주고 아내는 공부를 가르치며 나는 말씀을 증거 한다.

 

하나님이 선두로 가실 것이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미 2:13).” 안 믿는 가정에서 자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이들의 고충을 다 알지 못한다. 주일날이면 누가 독려하고 함께 가자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어린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시간을 정하고 제 발로 예배에 나와 지겨운(?) 시간을 견뎌내는 게 기특하였다.

 

어떠해도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짐승이라.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억지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던함일 거였다. 늘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를 쉬지 않는 일. 맡기신 사명이란 그렇게 또 인내하는 자의 것이었다. 아예 들은 체도 않는 아이들에 대하여는 더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마음에 두고 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하시는 주의 의지로만 가는 길이었다.

 

복음을 위해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봐야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무모함을 되풀이하는 게 사역이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나고, 아무리 어린아이들이지만 아니꼽고 되바라진 것에 짜증이 올라오기 일쑤지만. 그래서 주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내가 나를 주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그래 맞다. 성령의 기쁨이다. 주가 더하시는 마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천방지축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길을 여는 자’로 세우는 일이란, 그 가정에서 복음의 씨앗이 되기까지 우리야말로 ‘성령의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딸애가 선두에 서서 아이들을 상대하고 놀아주는 일을 담당하기로 한 것도, 그러기 위해 실패도 경험하게 하신 거였다. 싫다는 소릴 못하는 것도 말이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그렇지. 정작 우리의 수고가 저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닌 것이다.

 

가끔은 여기서 혼동하며 걸려 넘어진다. 아이들을 위하나 아이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솔직히 나는 아이들을 천사 같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가장 기대할 수 없는 대상이고, 소망은 영락없이 무너지기 십상이어서 매순간이 나와의 싸움이지 않겠나. 어쨌든 복음은 말로 전해지고 그 말은 우리의 실천으로 증명되는 것일 텐데, 우리의 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성령이 이끄시는 삶이어서 때론 하기 싫은데도 하게 된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마음이 자꾸 거기에 있다.

 

그래서 말씀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뤄지는 것이구나.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5).” 아이들이라 해도 저들에게 향하신 주의 사랑을 아는 데 있어 우리의 마음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더하시는 큰 확신으로 가능한 일인 것이고. 그래서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2:4).” 그러니 내 안에 사람에 대한 실망이나 서운함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이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6).” 저 아이들로 나의 보람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마음의 실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

 

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다른 데 마음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 수준에 맞추되 아이들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곧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4).” 성령이 하신다. 우리가 아이들 마음을 붙들 수는 없는 일이다.

 

저들로 ‘길을 여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오늘에 우릴 이 자리에 두신 게 된다.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나 혼자가 아니다. 아이들끼리 하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읽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미 2:13).”

 

참 설익은 사람이라, 나는 종종 아이들이 너무 싫다. 그 마음을 주가 아시면서 이리 내게 맡기신다. 적당한 반응이 오지 않을 땐 짜증이 인다. 화딱지가 나는 것이다. 어쩌면 다들 마음이 그랬던가? 우리는 뚱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 성도’가 있고 뭔가 가시적으로 되어 가는 일이 있다면 덜 지칠까? 그건 또 예의바름으로 그리 보여지고 여겨지는 마음의 분주함은 아닐까? 가끔 나는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말고 생각한다. 이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떤 불순한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혼자 공연히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보다 좀 순수하였으면 좋겠는데, 내 마음은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오늘 말씀이 그런 내게 일갈한다. 짐승이 아닌 증거다. 이런 마음으로 볶이는 데 다행이다. 나만 그런가 다들 그런가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다. 때로는 아내도 혀를 내두른다. 싫은 티를 너무 내고 성가신 마음을 감추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혼자 또 기대하고 기다리다 실망하고 시름하기 일쑤여서, 끌끌 혀를 차는 아내에게 나는 할 말이 없다. 점점 내 마음이 투명하게 느껴져서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게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오늘 말씀이 묻는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미 2:7).” 이 모든 되는 일이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나의 옹졸함이 주를 궁색하게 하는 것 아닌가? 주의 영이 성급하신가?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때론 아이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내가 오히려 주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우와 다를 게 없다.

 

그렇지. 내가 이를 생각하는 것이 짐승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스스로 일러 만족하는 경우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11).” 주가 하신다. 하나님이 앞서 가신다. 우리는 동시에 길을 여는 자이다. 그들 앞에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비로소 그들은 성문을 열어 그리로 나아갈 것이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13).”

 

마땅히 지치고 싫을 때도 있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아 기진할 때도 있다. 어떤 성과를 기대하는 일은 묘연하기만 해서 낙심하는 마음도 아까울 판이다. 그러나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염연한 사역이라. 피상적으로 알고 가는 길이 아니었다.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그렇구나. 내 안에 두시는 불쾌함이 또는 불안이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치닫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이게 맞나? 싶은 어떤 서운함도 궁극적으로는 그리하여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앞서 가신다는 확신을 더하시려는 거였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다른 걸로 만족하지 말자. 족한 줄 알자. 감사함으로 하자.

 

주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6-8).” 결국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서 치를 수 있는 값이 아닌 것이다. 내가 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말이다. 주가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히 2:6).” 돌아보면 이와 같은 고백밖에는 드릴 게 없어진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