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미가 3:5-6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편 50:21
기온은 영상을 가리키는데 아무리 껴입고 있어도 추운 날이었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서는 눈 대신 비를 흩뿌렸다. 유난히 지루하고 긴 하루였다. 어디가 조금 아프고, 마음은 우울하였으며 심심하고 답답한 기분이어서 더 까부라지는 것 같았다. 책 읽기도 지겨워서 혼자 청소를 하거나 글방 안을 서성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내게 성경은 새로운 살 길을 제시하는 듯 읽혔다. 할 수 있는 게 읽기와 쓰기뿐이라, 나는 심심해서 기도를 하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겉으로는 지겹고 답답한데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이 또한 외로움이어서 혼자가 아니면 어찌 말씀을 읽고 주의 이름을 부를까? 무슨 재주로 내가 주 앞에 나아갈까? 염치없고 뻔뻔한데도 ‘주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십자가로 죽기까지 하신 이가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다. 몸을 맑게 씻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주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이 말씀은 실질적이면서 분명한 증거여서, 더는 예전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깨끗하여졌다는 말씀, 이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성경은 나의 손을 붙드신다. 여느 교회는 월세도 감당하지 못해 기어이 문을 닫는 판국에 우리 교회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데도 이처럼 유지할 수 있게 하시니, 것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망해도 더는 감당이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확신과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내와 종종 이야기하면서도 느끼지만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는 데 뜻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은 믿음이다. 온전함이란 막연한 게 아니라 분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 늘 좀이 쑤시게 구는 안달이 일어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리기 일쑤지만, 것도 그래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으로! 나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게 감사하다. 이게 뭐라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이게 결국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 그와 같은 사실 앞에 부복하면 오늘 말씀은 내게 두시는 경고의 말씀이라. 세우심을 받은 자로서 그 사명이 막중함을 일깨우는 것 같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미 3:5-6).”
모르겠다. 나는 두려운 것이다. 기독교 신문이 불규칙적으로 배달이 되어 오는데, 온통 무슨 집회 소식이 대부분이다. 무슨 부흥을 외치고, 신유와 치유를 담보로 하듯 광고가 실려 있는 걸 보면 가슴이 철렁철렁한다. 물론 저들이 결코 그릇되다는 게 아니고 그와 같은 이유와 목적이 담보가 되어 주 앞에 나아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병 고침을 바라고 삶의 어떤 필요와 간구를 구하는 게 왜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게 이유일까 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어떤 목적이 있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하여 나는 두려운 것이다. 병 고침이나 어떤 신유를 목적으로 하여,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녀들의 건강을 위해, 이상과 꿈을 붙들고, 심지어는 천국을 바라서 주 앞에 나아오는 것까지도,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거기까지라. 그게 극성이어서 더 열심을 다하고 충심을 다한다면, 과연 그게 옳은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든다. 나에게 주시는 마음은, 내가 드는 생각은 무엇을 겸하여 주를 바라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
극단적으로는 그런 마음이면 헤롯도 같았다.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눅 9:9).” 과연 내가 바라는 주님에 대한 마음이 주님으로만 충분한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어 때로는 두렵다. 그래서 우울하다가도 우울하여서 다행이다. 아프다가도 아파서 다행이고 혼자여서 외롭다가도 외로워서 다행이다. 감히 견주어 생각할 때 바울이 고백하는 ‘자족의 비결’이 내 것도 그러하였으면 좋겠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1-14).”
이와 같은 일체의 비결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으로 인한 것이지 나의 수고와 애씀의 결과가 아닌 데 대해 감사한다. 그래서 어떤 결과나 반응을 가지고 주의 섭리를 운운하는 일은 어리석다.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다. 가난한 자들과 압제당하는 자들을 풀어주고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도 아니다. 선을 도모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선으로 오셨다. 어떤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구원으로 오셨다. 이를 바로 알려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선동하듯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빼곡하게 무슨 집회 일정을 알리고 있는 광고를 볼 때면 뿌듯하고 감사하기보다 어떤 두려움이 먼저 이는 것은 그래서일까? 주는 이미 다 아신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20).” 그러니 나는 다만 주 앞에 아뢰고 고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결과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주의 ‘인자를 따라’, 그 ‘긍휼을 따라’이다.
내가 무엇으로 주께 보답할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16:12).” 갚을 길 없어 나는 막무가내로 주 앞에 엎드린다. 씻음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나는 다만 주만 바람이다. 주께서 나를 은밀히 가르치신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그러므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주께서 행하심으로 나는 가능하였다. 내 노력의 결과가 결코 아닌 것이다. 교회를 두시고 이를 이루어가게 하심은, 나를 혼자 놓아두시며 주만을 독대하게 하심으로,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다 꺾여서 더는 바라는 마음이 없게 하신다. 수시로 이는 염려와 근심도, 또는 어쩔 수 없는 내 안의 온갖 죄악된 마음에 대하여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그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여서 그리 요란한 게 아니다. 마치 내가 나서서 선을 구하고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 일은, 그 입에 물 것을 찾는 자기 욕심에 빠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만족으로 구하고 바라는 모든 것은 헛되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도 볼 겸, 병 고침도 받을 겸, 저가 어떤 이적을 행하시나 보자, 하고 나오는 모든 수고는 거짓되다. 그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이라 다들 그렇다고 하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리 마음이 자꾸 가는 일에 대하여 애통하는 심령으로 주께 나아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고 의지하려고 하는데 내 안에 이는 여러 바람과 간구가 내가 사는 일에 윤택하기를 바라는 것이어서 송구하고 죄송하여 드릴 말씀이 없게 만든다.
그런 나를 혼자 두시고 때론 그 외로움에 쩔쩔매게 만드시는 것도 다 은혜라. 그러므로 주를 바란다. 그럴 수 있게 주님이 날 위해 중보하신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아, 나에게도 이 값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려고. 내가 무얼 자랑할까? 무얼 꿈꾸며 바라고 나아갈까? 주의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붙들지 않게 하시기를. 이를 작정하였음이라. 바울 사도의 결연함이 저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안다. 저의 의지는 오히려 주를 훼방하는 것이었으니, 사울이 바울 되어 그 심정이 어떠할지 알겠다.
나는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9).”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받는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정작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주 앞에 엎드려 노래한다.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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