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7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실내는 너무 복잡했다. 예배 공간으로 이쪽에 서면 좁고 저쪽에 서면 벽이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벽을 마주하고 서서 답답함을 느꼈다. 평소에도 조바심처럼 청소를 한다. 누구를 종일 기다렸다. 점심을 같이 먹을까 했는데, 결혼식장에 갔다 오는 걸 그리 미련을 떨고 굶고 말았다. 다 저녁이 되어서야 왔다. 아이들 학교 입학 문제로 어디에 추천서를 써주었다. 같이 믿음 생활을 하면 좋을 텐데, 내가 들어가 뭐라 할 부분이 별로 없었다. 마주 서면 벽이거나 너무 협소하여, 공간은 너무 좋은데 기둥으로 앞이 막혔거나 구석이었다.
그러니 뭐라 말은 못하고, 나만 이처럼 예민하여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는가, 했더니 본디 나의 약함이 그 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셈이기는 하겠다. 안달을 부리다 저 혼자 조바심치다, 걱정이 앞서거나 어떤 서운함에 시무룩해하거나.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걸핏하면 신경질을 부리거나. 쉽게 좌절하거나 늘 어떤 염려를 달고 살거나. 우울증이었을 디모데를 생각한다. 바울 선생이 옥에 갇히자 그 소식에 걱정을 해댔다. 바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괴팍하고 염세적이었으며 폭력적이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럴 때 그가 긍휼을 입었다는 고백은 새삼스럽지가 않다. 보면 나 또한 내가 잘할 때 은혜를 입은 게 아니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그러니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 아이가 수선을 피워 더는 말에 집중할 수 없었고, 늘 고마운데 어떤 아쉬움이 또 안타까움이 친정오빠처럼 마음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하긴 나의 염려는 이미 병적이어서 안정제를 먹지 않고는 누굴 만날 수도 어디를 갈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그래서 나는 이제 왜 그러냐고 묻지 않는다. 이겨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주지도 않는다. 그냥 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주를 바란다. 나의 바람은 간절하여서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저의 말을 들으며 모처럼 저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많이 깊었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5학년의 얼굴이 또 말투가 표정이 그대로였다. 벌써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참 오랜 시간을 곁을 같이 하며 살아온 것에 비해 어떤 아쉬움이, 또 안타까움이 벽처럼 느껴졌다. 보면 결국 선택한 것을 짊어지고 가는 게 인생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어떤 데서 위로를 찾느냐, 무얼 바라느냐, 하는 이 모든 게 켜켜이 덧입은 옷처럼 둔하기만 하다.
그럴 때 드는 마음,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시 55:6-7).” 훌훌 털어버리고 살고 싶은데, 기어이 그 마음은 하나 더 얹히는 것뿐이어서 무게만 더한다. 늘 생활에 지배당하는 꼴이라 감당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결코 손대시지 않는다. 결국 그 모든 선택을 내게 일임하시는 게 인격적인 관계다. 전에는 그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나의 선택을 존중하였고 존중받기를 원했다. 하나님도 어쩌지 못하시는 영역이라.
인격적인 관계란 결코 그 선택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누구를 만나 결혼을 하는 일,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일, 무엇으로 만족을 얻고 바라고 구하는 일. 아, 그래서 참 지혜란 그 모든 걸 주께 내어드리는 일이었다. 나의 권리를 주께 양도하는 것이다. 그 잘나빠진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귀환하는 일이다.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전폭 의지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바울은 염세주의자에 가까웠고, 디모데는 우울증환자였을 것이며, 모세는 혈기 방자한 우월주의자였고, 아브라함은 궁여지책을 강구하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아볼 때, 그 구획은 확연하여서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길 때와 그 전에 자신이 도모하고 어찌 하려던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내 안에 드는 이와 같은 불안이 또 초조가 실은 그러므로 주를 더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거였다. 신랑이 좀 더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아니 덜 똑똑하고 덜 능력 있는 위인이었으면 애를 좀 더 보듬어 주었을 텐데. 아이가 조금만 더 주를 바라고 사랑하였으면, 하고 생각하며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바울이 가장 평안했을 때를 꼽아보라면 빌립보서를 쓸 때가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언제 죽을지 모를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저의 노래는 아름다웠다.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8).” 말이 되는 소린가? 언제 형장으로 끌려가 이슬이 될지 모르는 판국에, 옥에 갇혀 한다는 소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그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3:1).”
성경은 종종 아이러니하면서도 고스란히 내 이야기를 건드리신다. 인생은 항상 온갖 문제들이 뒤엉켜 짓누르고 짓눌려 신음하며 허덕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와 같은 확신이 없다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처지에서 미신적인 마음에 현혹되고, 나름의 위로를 찾기 마련이어서. 그런 나 자신까지도 주께 의탁하는 수밖에.
오늘 아침 내게 주시는 말씀은 이에 그 확신을 더하신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누구는 더 큰 교회를 찾아가고, 시설 좋고 여건이 괜찮은 교회를 선호한다지만, 나로 하여금 옴짝달싹 못하게 하신 게 복이라. 아이들 때문에 또는 직장 문제로, 늘 우리 앞에 놓이는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로써 그나마 교회를 찾고 나름의 신앙을 자부하며 사는 꼴이지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달리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좋은 처지의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바울이 옥에 갇혀 모처럼 평안하고 서정적이며 우아하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기쁨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된다. 때론 조바심을 내다, 또는 안달을 부리다가도 내게 두신 것으로 만족하고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길 때의 기쁨이라니! 이를 어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나? 혼자 들어앉아 토요일 하루 종일 누구를 기다려야 했던 때에, 늘 그렇듯 유배되어 있어 졸지에 은둔 아닌 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내는 처지이면서도.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8).”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16).” 아등바등 사람에 끌려 다니고 일에 치여, 무리한 확장과 쉼 없이 말품을 팔아야 하는 큰 교회 목사님이 부럽지 않다. 나아가 온갖 정치적인 세상 노선에 휘말려 이 사람을 지지하고 저 사람을 적대시하면서, 그럴 거 없다. 아무리 좋고 또 훌륭한 일이라 해도 왜 돈벌이에 매진하고, 그러느라 드는 숱한 말품을 어찌 다 팔려하는지.
감옥 안에서 어찌 저의 글이 저처럼 평안할 수 있었는가, 알 것도 같다. 오히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3-14).” 이는 자신에게도 이르는 말이었겠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 이거야 말로 어찌 설명할 수 없는 황홀함이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나에 대한 누구의 염려가 나는 되레 안쓰러웠다. 결코 주 안에서 누리는 평안은 기질적인 문제도 문화와 전통의 특색도 아니다.
영생을 바랄 때, 그 바람이 그저 소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여서 나를 주도할 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이를 담을 수 있다면 내가 질그릇인 게 무슨 상관이며, 깨진 그릇이어도 어떻겠나. 주가 쓰시니 됐다. 남들은 하찮고 오히려 지지리 궁상스러워, 또는 안 됐고 불쌍한 처지라 여겨진다 해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곧 그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일. 그런 남편과 저런 환경과 이런 처지에 놓였더라도, 이상하게 감사하고 기뻐하며 평안이 넘치는 일. 아이들을 붙들고 앉아 기도라도 해줄 걸. 같이 무얼 먹을 때 식사기도라도 할 걸. 돌아가지 전에 손을 붙잡고 잠깐이라도 기도할 걸. 원, 내 마음이 나 혼자 아쉬워하며 안타까워하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내 안에 두시는 내 마음이 신비라. 주일 날 아침, 나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한다. 누굴 더욱 마음 쓰며 안타까워한다. 날씨 때문에, 또 너무 멀어서, 누가 있어서, 어떤 일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마음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그렇지. 그러므로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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