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미가 6:3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다. 오늘 미가서는 이를 먼저 듣게 하신다.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9).” 저는 말하길,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곧 돌아보아 주께서 나와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이를 잊을 때 새삼스럽고, 새삼스러울 때 엉뚱한 길로 빠져든다.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9).”
고1 올라가는 아이와 글의 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부자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많은 돈으로 고급 자동차를 타고 쇼핑을 하는 것이 취미였다. 어느 날 백화점 쇼핑을 마치고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차장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허름하게 옷을 입은 아이 둘이 서 있었다. “도와주세요. 며칠째 밥을 먹지 못했어요.” 자신에게 다가와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차갑게 말했다. “저리 가. 이 백화점은 이런 애들을 들어오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저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차를 타고 돌아갔다. 집에 돌아 온 부자는 생활 보조금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딱한 사연을 뉴스를 통해 보게 되었다. ‘아니,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저는 화가 나서 하나님에게 따졌다. “하나님, 왜 세상을 이렇게 만드셨나요? 저들이 왜 저렇게 불쌍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시는 거죠?” 그때 그 사람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것도 마련해 주지 않았다고? 그래서 너에게 돈을 많이 주지 않았느냐?”
남을 이야기 할 때 당당한 사람은 결코 자기 이야기로 가져오지 못한다. 자신도 인정하듯이 말하지만, ‘나도 다를 바 없지만 세상이 너무 악해.’ 하는 식이면 곤란하다. 늘 우린 그런 식이다. 자신도 다를 바 없다고 인정하는 듯하면서, 떠넘기고 미뤄 남을 탓한다. 그 안에는 저 부자와 같이 하나님께 그 책임을 전가하는 마음이 있다. 아이는 8백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여지없이 그렇고 그런 사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으면서 정작 자기 이야기로 가져오려니까 어려워했다. 아이가 입고 있는 롱패팅은 이번 겨울에 산 60만 원짜리였다.
주를 경외할 줄 알려면 그게 내 이야기로 들려야 한다. 남 얘기하듯 할 땐 할 말이 많은데 정작 내 이야기로 들으려고 하면 싫다. 한사코 외면한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일은 그 당사자가 나로 놓고 듣는 일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가가 전하는 말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6:3).” 당시의 누구에게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다. 아이는 이를 어려워했고 나 또한 순식간에 다른 사람 이야기로 하고 있다.
조금은 기분이 가라앉은 날이었다. 누구는 이곳에 오는 길에 들른단다. 어떤 말을 해주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정도 선에서 더는 다가오지 않는다. 뭐라 해도 듣질 않는다. 듣지도 않는데 왜 자꾸 뭐라 하게 하시는지, 나는 졸지에 하나님께 되물었다. 말해봐야 소용도 없을 텐데 나더러 어쩌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내게 들려주신다.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순간 나는 저보다 열 배는 더 말을 듣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나름 억척스럽게 사람을 바라고 어울려 행복해지려고 애쓰던 때를 떠오르게 하셨다. 돌아보니 그 일이 내겐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던가, 알겠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만족하려 들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하였는지를. 내 이야기로 가져오지 못하면 모든 그림에 떡이다. 나는 뉴스를 보면서 어떤 일에 화를 낸다. 누구의 욕심과 허튼 거짓말에 치를 떤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나에게 관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누구에게 뭐라 일러도, 내 말에 권위가 서지 않는 것 같아 기분 상하고 우울해하기까지 하니!
나는 ‘나발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삼고 설교 원고 초안을 잡았다. 평소 나는 얼마나 자주 나발스러운가? 저의 만족은 ‘심히’ 부한 데 있었다.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였다. 그런 그이가 그 자신의 부를 당연하다는 듯 여긴 것이다. 저는 비아냥거린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삼상 25:10).” 정작 몰라서 그리 묻는 게 아니라 다 알면서, 그에 대해 비난하고 조롱하는 데 능한 것이다.
내 안에 늘 남을 향한 마음이 그러하다는 걸 알았다. 아내에게도 벌써부터 일러 동대문 집이 어떻고, 그 일은 손위 처남이 어떻게 풀어야 한다는 둥 뭐라 하고는 혼자 비난한다. 누구에게도 저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고 있는 데 대해 뭐라 한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데 능하다. 그래놓고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며 무시당한 느낌으로 저 혼자 화를 낸다. 나는 수시로 ‘나발’이다. 저는 다윗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인색하였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11).”
본문에서 나는 또 혈기 내는 다윗과 다르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다윗답지 못하게 발끈하였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13).” 그 숱한 광야를 떠돌며 이제 좀 수그러들 때도 됐는데, 욱 하고 올라오는 혈기는 사리분별을 못하게 만든다. 수시로 나를 쥐고 흔드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이 두 남자의 방자함에 비춰 돋보이는 게 아비가일의 현숙함이다.
저는 먼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일깨웠다(24-25). 얼마나 우린 죄악 된 존재인가를 알게 한다. 저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떠했던가를 주목하였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26).” 용서를 구할 줄 아는 것은 용기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29).” 우리의 목숨이 하나님의 생명 싸개에 싸였으므로 오늘에까지 안전하였던 것을, 그리하여 다윗이 잊은 듯한 골리앗을 무찌를 때의 그 전폭적인 주의 바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명료하다.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
이처럼 말씀 앞에 앉으면 온통 내 얘기다. 하나님은 나 말고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 누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나는? 그 일이 무엇이든, 그래서 나는? 정작 이 모든 일에 주의 관여가 있음을 ‘생명 싸개’로 나를 보호하심으로 읽힌 대목이었다. 결국 스스로는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단 한 사람도 없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종종 억울한 건 왜일까? 나는 나름 이런 수고와 저런 애씀으로 주를 바라고 섬기는 듯 구는 마음이 남을 다 아는 것처럼 비판하게 만든다. 저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을 때, 불쑥 혈기가 먼저 올라온다. 저주도 거침이 없다. 그러다 어떻게 되는가 보자! 하는 심보로 결국 주를 원망하는 소리다. 어떻게 보고만 계실 수 있나요? 하나님은 뭐하고 계신건가요? 하는 식으로. 아, 나는 나의 지각으로 훈계질이나 할 줄 알지 정작 선을 행함이 없구나!
오히려 성경은 그런 저들의 허물을 내게 지라 하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주께서 그리 하셨던 것처럼 나더러도 그리 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나는 참견이나 하고 뭐라 훈수 두는 데 능하지 정작 저의 허물을 대신 질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아,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가소롭기 그지없는 하루였다. 뭐라 하면 뭐하나 싶어 나는 졸지에 침묵한다. 뚱한 것이다. 입을 꾼 다문다.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래놓고는 심기가 불편하다. 신명이 나지 않는다. 뽀로통히 해서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제풀에 심각한 것이다. 나는 늘 나와 싸워야 한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6).” 나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라. 나의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신다.
누굴 판단하고 비난하기 잘 하는 내게 그것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오늘 미가서는 변론하자고 든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6:1-2).” 내가 그리 높이고 귀히 여기는 산을 향하여 변론하자.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의 주권을 나는 과연 인정하는 자인가?
주의 생명 싸개로 나를 감싸지 않으셨다면 내가 오늘까지 살아있는 게 가당키나 할까? 내 스스로 너무 ‘심히’ 부하다. 자기만족에 겨워 누굴 운운하며 조롱하고 멸시하는 나발과 다를 게 없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범적인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결국은 주의 일을 나타내시고 주의 일을 부흥하게 하시기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바라며 주께 아뢰는 일.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미 6:3).” 주 앞에 고한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 53:4).” 그게 나였음을. 내가 그러고 있던 것을. 수시로 그리 굴며 완고하였으니. ‘주의 긍휼을 잊지 마소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두렵고 경건함으로 오직 주만 바라는 아비가일과 같은 마음으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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