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미가 7:7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시편 54:1
자신을 숭배하는 시대다. 사회는 부추기고 교육은 이끌어 자기주도적인 삶을 가장 가치 있는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아이들은 더 이상 말로써 돌이키게 할 수 없고, 어른들은 나름의 신념으로 굳어져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들 저마다의 이상과 꿈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자신들의 나아갈 바를 밝힌다. 어린아이 둘과 칠순을 눈앞에 둔 노인과 대화를 한 날이었다. 날이 몹시 추웠고, 그 이유로 굳이 오지 않았어도 무방할 거였다. 두 아이는 성실하여서 맡은 바 그 책임을 다하는 입장에서 글방에 왔다.
서로 웅크리고 마주 앉아 한 아이는 ‘어느 부자 이야기’로 한 아이는 ‘어느 소녀 이야기’로 소재를 잡았다. 책 읽기 싫어하는 한 소녀가 있었다. 누구에게 책을 선물 받았는데 달가워할 리 없어 어딘가에 던져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저는 그 책의 작가였다. 돌아와 어디에 던져두었던 책을 찾아 읽고, 그 책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부자 이야기’는 이번 주 소재이기도 하여서, 실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가난한 이들은 외면하고, 뉴스를 보고는 부당하기만 한 하나님의 처우를 따진 내용이다.
칠순이 낼모레인 노인은 아침이면 건너와 차 한 잔을 하고 간다. 저이 덕분에 아침마다 나도 커피 대신 차를 마시게 되는데, 서로 나누는 대화란 게 어떤 주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겅중거리다 보면 말은 그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흩어진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마나님 살아생전에 같이 교회를 좀 가시라 권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게. 듣다보면 오히려 이 땅에서 잘 살려면 불교나 천주교인이 좋다. 개신교는 너무 편협하고 옹졸하다. 사는 것도 제일 궁상맞다. 굳이 억매이지 않고 사는 불교인이나 모든 걸 수용하고 포용하는 천주교인 들은 그 형편이 여유롭기까지 하다.
세상을 두고 그리 역설을 할 때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내가 아는 내 주변의 이들도 이를 증명하듯이 저이는 그래서 부자로 잘 살고 이이는 이래서 너그럽게 잘 산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닌 것을 말하려 들면 가당치도 않은 소리가 되고 만다. 노인의 가장 큰 특징은 청맹과니이다. 눈을 뜨고 보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맹인이라. 빛이 들어가지 않으니 뭐라 한들 계속 같은 말을 맴돌 뿐이다. 아이들도 다를 게 없어서 기껏 말로써 도왔는가 싶으면 전혀 엉뚱한 이해로 결론을 맺기 일쑤다.
아,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내가 저들을 이끌어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교회로 오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화려한 언변으로 저들을 설득력 있게 붙드는 게 능사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내 말이 또는 나의 사는 모습이 저들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나는 좌절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진한다.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은데 하나님은 자꾸 그런 자리로 나를 내어두신다. 자기 숭배의 시대다. 어느 때보다 자기애가 널리 수용되는 시대다. 네가 좋은 걸 해, 널 위해 살아, 너밖에 없어, 하는 말이 자연스럽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이와 같은 추세여서, 황혼 이혼이 별스러운 게 아니며 혼인 없이 사실혼이 널리 포용되고 있다. 훨씬 실리적이다. 살아보고 산다는 말이 가장 적절하게 적용된다. 친구 하나가 모처럼 전화를 주었는데, 같이 사는 이와 그럼 교회 앞에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렇게 싫어한다. 굳이 이 나이에, 새삼 그런 관계로까지, 번잡스럽게, 싶은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부정하고 사는 사람들이면 뭐라 할 말이 없지만, 믿는다고 하는 이가 저러니 더욱 개탄스럽다. 뭐라 한들 듣지 않는 이에게 나는 좌절한다. 그래도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저 묵인하고 말아야 하는 것인지, 나는 갈등한다. 한 사람은 자식을 체벌하는 문제로 발끈하여 마치 매를 드는 것이 야만적인 일이기나 한 것처럼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내세우며 우쭐하였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자기통제불능의 자녀들은 그저 자기들 좋을 대로 사는 걸 무슨 권리인 양 떠벌인다. 청소년범죄는 이제 성인들의 악을 능가하여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지경에 이르렀다.
몹시도 추웠던 날. 나는 새삼 나의 말하기에 환멸을 느꼈다. 오후께 걸려온 친구와의 통화에서까지도 깊은 한숨만 나왔다. 자기 숭배는 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죄를 죄라 인정하는 것을 마치 자존감이 낮은 일로 부추긴다. 성경에서의 ‘하지 마라’는 가장 적절하지 못한 말씀이 되었다. ‘하라’는 것이야 하다 못할 수도 있다고 여기지만 대놓고 ‘하지 마라’는 말씀은 적개감만 불러온다. 그러니 점점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자기 욕구에 시달리면서, 스스로 존엄을 운운하며 가치판단의 기준을 낮추어간다.
나는 새삼, <이 몸의 소망 무언가> 하는 찬송을 허밍으로 불렀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앞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바로 서리라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새찬송가 488장)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영국의 모트(1797-1874)는 어느 날 언덕을 오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게. 이 몸의 소망 무언가? 내가 저 아이를 두고 소망을 품을 것인지. 어떤 업적을 꿈꾸고 일을 이뤄나갈 것인지. 우리 주 예수뿐이다. 저는 나의 반석이시다. 신령한 음료이시다. 나와 똑같이 살다 가신 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니 누구보다 나를 더 잘 아실 이시다. 사람으로 실망하지 않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어떤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무얼 이루어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놓여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다만 나는 한 노인 앞에 앉아 있을 뿐이고 저가 말할 때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한 아이가 내 말을 전혀 엉뚱하게 이해하고 말아도 나는 실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저를 위해 기도하다 어느새 나를 위해 기도한다. 모든 일에 나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그래서 나를 더 잘 동정하시는 이께 기도한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내게 마음을 더욱 다질 수 있게 하신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이 몸에 소망 무언가? 한 영혼을 사랑하되 사람이 아니다. 내일모레 주일에 나와! 하고 말하면 풉, 하고 비웃고 마는 아이 앞에서 나는 모멸감이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주를 믿으시라, 하면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며 일장연설이 이어지는 나이 든 남자의 자기 숭배 앞에서 기진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더불어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내가 누구를 구원할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나를 변호할 수도 없음을 고백한다.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나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러니 가시적으로 아무 것도 나아지는 게 없는데 왜 또 이 사람 앞에서, 저 아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실망하다가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알면 알수록 수월해질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하여서 또 다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다, 환난은 인내를… 반복되는 나날의 삶을 통하여,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아, 그렇구나. 기어이 내 안에 이 소망을 부끄럽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구나! 내가 또 저 아이 때문에 실망하고 어느 친구의 말에 괜한 소릴 꺼냈나 좌절하다가도, 이 소망이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은 나에게 주신 성령으로 인함이었다는 사실. 말하게 하시고 또 듣게 하시면서 저 아이 앞에 나를 두시고 이 노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심은, 내가 여전하여서 그보다 더 완고하고 사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부은 바 된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던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리시는 거였다.
그래서 복음이란, 복음이 복음다운 자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나의 죄악은 진홍 같이 붉다는 것을, 이를 모두 사하심으로 나를 사랑하셨다는 데 대한 증거였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헛된 것 같고 또 늘 그저 그게 그 타령인 것 같아도, 나에게 소망을 주시는 이의 뜻을 알겠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그러므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그러므로 나는 나의 좌절도, 환멸도, 실망도, 그 어떤 지겨움도 사랑한다. 사랑할 의무가 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미 7:5).”
곧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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