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1:13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시편 58:9
실제의 나와 내가 바라는 나는 다르다. 그 차이를 느낄수록 나는 죄악 됨을 고백한다. 누구의 말처럼 ‘죄는 사람의 유별난 행위다.’ 누구나 상처를 가졌고 나름의 비밀을 간직한다. 행복하려면 감추고 살아야 한다. 나를 내 자신에게조차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마주하려면 그 얄팍함에 치가 떨린다. 가령 나는 자격지심에 열등의식이 강하다. 이는 내재되어 있다가 슬그머니 일어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 또는 어떤 상황을 모면하려고 얼마나 동시적으로 위선을 떠는지 모른다.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곤 하지만, 주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어떠했으면 좋겠다.’ 하는 모습과 늘 배치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늘 악이 먼저 앞선다. 욱, 하고 치미는 것으로 나를 뱉으면 남을 비난하는 소리로 나오고, 삼키면 차가운 침묵이 된다. 보여지는 나 자신과 실제의 나는 엄연히 다른 것이어서, 이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속수무책이다. 무력감에 휘둘린다. 어찌할 수가 없다.
유난히 혼자 있는 시간이 힘든 하루였다. 날씨 탓에 몸은 어렵고 마음은 가라앉아 책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신경과민은 저 혼자 시름시름 앓는다. 그러다 불쑥 아내의 말 한 마디에 성마른 소릴 내지르고는 또 그런 내가 환멸스러워 정나미가 떨어진다. 문득 나는 내가 아픈 것을 선호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의 책임을 미루는 데 정당한 회피를 도모하는 것이구나. 그렇듯 피난처로 삼는 게 실은 내 아픈 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되는 구실을 한다. 이 또한 마주하고 있으려면 역겨운 마음이 든다.
병적인 예민함이 있는 것처럼, 사울의 미신적인 경건은 도를 넘어섰다. 오전에 성경을 읽다 새삼 놀라웠다. 다윗도 같은 시점에서 다급하였다. 다급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각각 사무엘상 28장 15절과 30장 6절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사울은 언돌에서 영매를 통해 강령술로 죽은 사무엘을 끌어올렸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삼상 28:15).”
당장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이었다. 그 시각 다윗은,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30:6).” 시글락 아기스 왕 수하에 들어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였다. 저가 블레셋과 함께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였다. 저들은 행여 몰라 같은 민족 편에 설까 하여 다윗을 배제하였다. 그때 아말렉이 성을 공격하여 노략하고 다윗의 두 아내를 비롯하여 저의 백성을 끌고 갔을 때였다.
살다보면 다급함은 필연적이어서, 사울은 앞뒤가 다른 꼴을 보인다. 마치 적폐를 청산하듯 점치는 자와 영매를 없앴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28:3).” 그래놓고는 블레셋과 전쟁을 치러야 할 때, 영매를 찾아가 이미 죽은 사무엘을 끌어올려 어찌 하면 좋은가, 물으려 했던 것이다. 뭐라 하기에 앞서 저의 노력은 가상하지 않나?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무서운 일이다. 스스로 어떻게 하려는 경건의 노력이 말이다. 미신적으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들이 말이다. 온갖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위가 다 그런 것이어서 바울 사도가 기겁을 한 아덴의 도시처럼 종교심이 강한 것에 대하여,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놀라운 것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
아덴은 철학의 도시였다. 그리스 신화의 온갖 신들이 범람하던 때였다. 이에 반하여 스토아철학과 같이 이성을 앞세워 나름의 정직과 성실을 구사하는 이성주의자들이 함께 공유하던 시대다. 사울 왕의 저와 같은 미신적인 행위가 오늘 날에도 없겠나?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운수를 점치듯 하는 교회 안의 어떤 행위도 주의한다. 말씀 카드를 뽑아 한 해에 주신 말씀으로 삼는다든지, 누구의 기도를 대언하는 일이나 영적 허기를 달래주는 기법의 경건한 찬송이나 고함을 지르는 ‘주여 삼창’ 같은 행위도 주의한다.
언젠가 누가 와서 말할 때, 자신은 주일 날 보다 금요기도회를 더 좋아한다고. 실컷 소리 지르며 기도하고 오면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 없다고. 그래서 주일은 종종 빠져도 금요 철야는 절대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나는 사울 왕의 다급함을 이해한다. 허기진 영혼은 그 어떤 미신적인 행위에도 희망을 두는 것이다. 교회를 다녀와야 마음이 놓이는, 거실에 십자가를 둬야 하고, 성경을 의무적으로 몇 장씩 읽어야 할 것 같은. 병적인 영혼의 갈급함은 기계적인 자기 수고에 만족하고, 사는 데 따른 ‘다급함의 정도’에서 주를 바란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은 훨씬 악하다.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없는 세력이 내 안에 있다. 바울 사도의 절규를 나는 그리 듣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도처에 깔려 있는 미신적인 행위로써의 신앙 생활을 걷어내야 한다. 자기만족을 위해 주를 믿는 게 아니다. 어제 하루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여검사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가 모 교회에서 간증을 하는 동영상을 보았다. 회개를 운운하며 용서를 구하는 저의 가증함에 치가 떨렸다.
실제의 나는 그렇게 악인과 다를 게 없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나는 몇 겹의 거죽을 더해 위선과 자기만족으로 포장된 모습이다. 나는 언제든 사울 왕의 다급함을 더 선호한다. 어떤 신호를 기다린다. 영매를 찾는다. 죽은 사무엘을 끌어올려서라도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그래놓고는 남의 눈에 비춰질 자신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칼 위에 몸을 던지는 사울의 마지막 모습이 가련하였다. 웃기는 소리 같지만 얼마나 우린 남을 의식하며 사는지 모른다. 그러느라 더해지는 가식에 익숙하여, 거짓은 어느새 진실보다 진실 같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회에서 나는 사울인가, 다윗인가? 머리로야 다윗을 꿈꾸지만 다급함이란 본래 ‘오래 된 일이라, 술에 취해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는 식으로 자신을 은폐하는 법이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용서를 구한다니! 이 얼마나 철면피 같은 가증함인가? 앞서 수차례 그 일을 입막음 하였고, 불이익을 주는 처분을 내리면서 자신이 구사했던 온갖 ‘실제의 나’를 저는 어찌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오늘 같은 말씀 앞에서 난감하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악인들을 벌하시라, 말씀드릴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나는 결코 악인이 아니지 않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죽어 마땅한 악인이라 그저 나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 고개 숙일 따름이다.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시 58:9).” 나의 악은 태워도 태워도 악으로 남을 것이어서.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3).” 검사장의 회개가 더욱 치를 떨게 하는 것은 그래서였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4-5).” 아,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6-8).”
하는 기도 앞에서 나는 내 몸이 저려 살 수가 없다. 그것이 나일진대 실제의 나를 마주하는 일은, 남들이 아는 나보다 내가 아는 나로서도 감당이 안 된다. 사울이 활에 맞아 죽어간다. 저는 그 모습이 누구에게 어찌 비쳐질까 염려하며, 따르던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한다. 한데 저는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이내 자신이 자신의 칼에 몸을 엎드렸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삼상 31:4).”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실제의 나’는 그런 것이다. ‘누구도 자기 몸종에게는 영웅일 수 없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속속들이 다 아는, 실제의 나를 스스로도 마주하기란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닌 것이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5).” 가련하다. 사람의 사람됨이 참으로 가련하다. 그러니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누가 감히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 말씀 앞에 난감하다.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시 58:10).” 감히 내가 누구일진대 악인의 보복 당함을 기뻐할 수 있을까?
실제의 나는 안다. 내가 누구보다 악하다는 데, 실제의 나는 늘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괜한 소리가 아니라, 나는 결코 나로써 구원 받을 수 없다. 나는 절망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런저런 생각이라면 제 칼 위에 엎드린 사울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시 25:6).” 나는 절규한다. 나의 죄악 됨을. 실제의 나를 감당할 수 없음을.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용서하오서. 나는 내가 참 두렵다. 이에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5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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