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전봉석 2018. 2. 2. 07:1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2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시편 60:4

 

 

 

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성경을 읽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이야기로 들려진다. 나와 상관없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담의 이야기가 여전히 내 이야기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우리 이야기를 읽는다. 아이들에게 글쓰기 방법으로 자기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너무 작위적인 글이 되지 않는가 묻지만 본래 모든 객관은 주관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책 읽기를 강조하고, 여러 이야기를 권한다. 더 높이 더 넓게 창을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이야기에서 우리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에서 자기 이야기를 읽어내고 끌어오기까지. 모든 우리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긴다. 성경은 이를 위해 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과 역사와 주변국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과 추구하시는 바 그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배려’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하면서 그런저런 설명을 해주다가 깨달았다. 모두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로 정리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도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는 그에 대한 정의다. 천지 모든 만물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오늘 본문도 이를 알게 한다.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합 3:9).” 시간이 시작되고 대자연의 숨결이 스며,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10).” 더러는 사람만 이를 부정하지 그 외의 모든 생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11).” 찢어지게 파란 하늘은 청명하여서 차가웠다. 아침, 점심, 저녁 나의 하루는 글방을 오가며 듣는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2).”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내가 아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다. ‘주의 일’이다. 부흥을 바랄 때 우리는 종종 지복(至福)을 바라여서 엉뚱한 공상을 하곤 한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나의 어려움과 곤란한 처지에서도 나는 주의 일의 부흥을 바람이다. 곧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시 60:4).”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내가 살아서 주께 쓰임 받는 동안에,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주의 이야기가 읽혀주기를 소망한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설명하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자기 이야기와 상관없는 주제란 없다. 주제와 관련된 글감을 찾는 것에 그리 어려워들 하여서 들려주던 말이었다. 누가 어찌 되고, 어디서 무슨 사고가 터지고, 지구가 어떻고 하는 모든 상황과 사건이 괜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는 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었다.

 

번번이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지 못하는 데, 하나님을 잊은 데 있었다. 하나님의 이야기로 듣지 못하는 이들이 이방민족이고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는 이들이 주의 사람들이었다. 다급함으로 갈린 두 사람,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에서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 가운데 스미신다. 주의 관점을 드러내신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지? 하는 부분에서 더욱 강렬하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리고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신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이 쓰이는 까닭은 그 일 가운데 하나님이 말하고 싶으신 게 있는 것이다. 문득 떠오른 누구에게 안부를 묻고 새삼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다. 어떤 일로 마음이 쓰일 때, 나는 동시에 내 안의 어린아이가 당혹스럽다. 별 것도 아닌데 서러워하는 마음이 일 때는 말이다. 여전하여서 늘 나를 따라다니는 아이라.

 

그러니 이 속을 누가 알까? 아무도 실제의 자기를 알 수 없는 이유다. 이미 이처럼 표현되는 나는 동시적으로 덧대어지는 내가 있다.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서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는지. 무얼 더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인지. 햇살 가득한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다 생각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 이야기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저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기까지 말이다. 결국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그 화목을 나에게도 부탁하신 일이라. 나는 아이들에게 마음에 있는 미움과 질투와 시기와 원망과 불만과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수치와 농밀한 비밀에까지 이르도록 자기 이야기를 끌어내라고 말한다.

 

생각이 안 나요, 하는 것은 그러기 싫다는 소리다. 그래서 남 이야기로 대신하고, 누가 그러는데요,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기 일쑤다. 비밀은 독립된 자아의 특징이다. 아이를 황폐하게 만드는 일은 ‘내가 네 속을 다 알고 있어!’ 하는 것이다. 비밀을 저당 잡힌 아이는 주눅이 들어 고분고분 한 것 같지만 더 큰 위선을 덧입는다. 이를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일이 기도이며 회개이고, 그 회개의 열매가 화목이다. 책임인 것이다. 그 책임을 다해 독생자를 주어 죽으시기까지 우리와 화목을 도모하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들 글 읽는 것을 좋아한다. 글이란 잘 쓴 글 못 쓴 글로 나뉘는 게 아니라 좋은 글 나쁜 글로 나뉘어야 맞다. 요즘은 다들 재치 있고 위트 있게 잘 쓴다. 거기에 자기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면 맹탕이라. 좋은 글이란 솔직하게 자신을 마주할 때 나온다. 이는 연습과 같아서 훗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데 사용된다. 이번에 어느 여검사의 고백을 두고 누군 괜한 소리라 하지만, 나는 저이의 침묵하고 있어야 했던 지난 8년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시기를 지나느라 우린 여전히 덧대고 또 덧씌워 마치 아닌 척, 괜찮은 척 열심을 다해 사는 것이기는 한데. 그 속이 오죽했을까? 비밀은 한 사람이 독립된 자아를 가진다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풀어놓아야 할 자기 이야기로 얹혔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글에서는 그 티가 너무 생생하여서 때론 애처롭다. 다 아는데 다 알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들려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아이도 그것이 글로 또는 말로 나오기까지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어느 검사의 회개가 진정한 열매로 나타나기를 기도하였다. 용서를 빌고 정직하게 그 피해자와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서면 어떤 수치도 모욕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겠으니, 우리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그리하신 게 아닌가. 곧 날마다 내 안에 이는 온갖 숨김과 위선과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고. 그동안 그처럼 안간힘을 쓰며 살아야 했던 것들로부터의 놓여남을 받게 하시려고.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결국은 쥔 것을 놓지 못할 때 자복은 회개에 이르지 못해 열매가 없다. 아간의 고백을 회개라 할 수 없는 이유겠다. 일련의 모든 정치 상황과 세계정세와 지구 환경의 아우성들이 내게 들려주시려는 하나님의 이야기시다.

 

그래서 아이에게 글 한 편을 쓰게 하는 일은 쉽지만 그 속엣 얘기를 끌어내게 하는 일은 어렵다. 당면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종종 그래서 나는 내가 먼저 엎어진다. 나의 고백이 아이에게 어찌 들릴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럴 때면 아이를 위해 나를 두신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아이들을 보내신 것임을 깨닫는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여야 한다. 누가 날 우습게 여기는 게 대수인가. 정직은 모두의 문을 연다.

 

세 명의 아이가 결국 자기 이야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 못 써도 괜찮다고 해도 아이들은 이를 자꾸 숙제로 여겨 지레 부담스러워한다. 정말 아무 거나 써도 돼요? 하고 재차 묻기도 하면서. 중2 아이의 속은 늘 알다가도 모르겠다. 부디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아이의 이야기가 발견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중3 아이는 또 무슨 일이 생겨 못 오게 됐다면서 구구절절 변명이 길어졌다. 그럼 주일에 보자, 하고 말할 때 네, 하고 답을 해주어 나는 또 설렌다. 번번이 속으면서도 싫지 않은 바람이다.

 

내 안에 드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내 것이겠나?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시 60:4).”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이를 내가 내 이야기로 말할 수 있을 때 오늘의 말씀은 큰 버팀이 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곧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그럼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