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스바냐 1:14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편 61:3-4
우리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말을 거시고 나의 말을 들으시는 대상이라는 것. 말을 나눈다는 것은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지각과 이해와 공통의 관심이 있다는 소리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말을 거신다. 엘리야에게 포근한 바람결로, 모세에게 불붙은 가시떨기나무로, 나에게는 어느 날 문득 짙은 안개더미로. 네가 어디 있느냐? 네 동생은 어디 있느냐?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느냐? 아담을 부르시던 하나님이 가인을 부르시고, 하갈에게 찾아오시기도 하신다. 은밀한 중에 말을 건네신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4).” 저는 나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계신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0-31).” 일부러, 직접, 손수 만드시고, 예비하시고, 죽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나를 아심이었다.
그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게 나의 위선이었다. 외식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요 며칠 다윗보다 사울에게 집중하면서 저에 대한 애착이 생겼는가, 나는 은근히 마음이 어렵기까지 하였다. 참 나름은 한다고 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몰라주고 하나님도 알아주지 않으시니, 더 기를 쓰고 애써 수고하였던 인생이다. 설교 원고를 마치고 칠판에 당시 지도를 그려보며 다윗의 행적과 사울의 여지를 생각하였다. 은총이 아닌 모든 것은 허물이었구나. 아무리 선하고 의롭고 애써 수고하여 공적을 이룬다 한들.
아이들 개학으로 시간이 뒤엉켜 오후에 두 팀의 아이들이 오지 못했다. 덕분에 소파에 길게 누워 허리를 지졌다. 딸애는 기어이 계약기간을 다 채우고 일을 마쳤고, 가정예배 때 읽고 있었던 성경도 다시 구약을 끝내고 신약으로 돌아왔다. 더 춥다 어쩌다 해도 2월의 햇살은 1월과 또 달랐고, 나의 하루하루는 그 날이 그 날인 것 같으면서도 날마다 새로웠다. 내가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사이. 개인적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 남다른. 성경은 각각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과의 관계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다.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비록 속상하게 생을 이루다 마감하였지만 사울은 바로 그 자기의 하나님과 관계 맺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말이다. 무엇을 통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었다. 사울은 왜 사울의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했던 것일까? 왜 직접 자기의 말과 언어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것일까? 기어이 죽은 사무엘을 끌어올려 대신 듣고 대신 또 말하게 하는.
은총이었다. 말을 걸 때 그 말을 거절하거나 외면하면, 하나님과의 단절은 은총이 막히는 거였다. 범죄 후에 아담에게도, 가인에게도 그리 찾아와 먼저 말을 거셨던 이가 하나님이시다. 실은 이때에도 들을 수 있는 은총이 주어져야 주의 말을 듣고 이에 돌이켜 주를 바라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참 안 좋은 생각으로 위기에 몰렸던 나에게도, 저수지에서였다. 안개가 짙어 온 사방이 구름 속에 가리어진 것 같았을 때. 쉬고 싶고, 그만 걸어 들어가고만 싶던, 그때의 그 강렬한 유혹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겁 없이 운전하고 함부로 사람을 만나고 이 일 저 일 아무렇지도 않게, 시비를 걸 듯 하나님을 갈구하던 때였다. 몸도 마음도 너무 고단하여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나는 얼마나 몹시 갈등하였는지 모른다.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그 강렬한 바람으로 몸서리치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외마디, 주님! 그때의 나의 몸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울고 있었고 눈물 하나하나가 떨어지던 소리가 안개 낀 새벽에 너무 크게 들릴 정도였으니. 주를 원망하고 사무쳐 버럭거릴 수 있는 것도 은총이라. 주님은 나를 부르고 계셨던 것이다.
예기 바람이 있었다. 혼자 늘 쫓기듯 도망쳐 저수지에 앉아 있곤 할 때면 어느새 흥얼거리곤 하던 찬송들. 허밍으로 따라 부르다 보면 마치 혼자 부흥회를 하고 온 것처럼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 있곤 하였으니. 차마 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서도, 어떤 사람과 어울려 이상하게 싫고 또 혐오스러운 때에도. 나는 아직 인지하고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하나님은 두 번 세 번 연거푸 나를 부르고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욥 4:17).” 일찍 내가 애써 잘 살아보려고, 나의 열등의식을 이겨내고 자격지심을 부정하면서 낙천적이고 활달하게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등 비비며 살아보려고 하던 때에는, 그것이 외면이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데를 외면하고 엉뚱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답답해하던 시절이었다. 여전하여서 누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아직도 ‘마라의 쓴물’을 운운하며 홀로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애씀이 결코 주의 은총의 단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가만있으라. 멈추시라. 그럼 더 깊이 빠져들 것 같아 아등바등 기를 쓰는데, 그러느라 첨벙거려 정작 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사람이 어찌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할까. 나름 한다고 한 것이,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 그 수고가 오죽했던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7-9).”
바울의 사울 적 고백이 우리 이야기 아니던가. 내 열심이 유익이라 여기던 것도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이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외에는 그를 위하여 다 잃어버렸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내가 가진 의도, 원칙도, 기준도 쓸모없는 것이었으니. 나의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의다. 이는 두려움이면서 환희다. 고개를 들 수 없이 부끄러움이면서 감당하지 못할 기쁨이다. 주체하지 못할 영광이라.
이제 알겠다. 그동안 나의 수고가 어떠했냐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아예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무리와 살면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여전히 전도사로 생활하면서 어쩌자고 마라의 쓴물을 마시고 있는 것일까? 불순종의 자리 아닌가? 거기가 자기 의를 세우려는 곳이지 않나? 앞서서 나의 날들을 돌아보면 나의 수많은 날들이 그리 허비되었던 것이다. 다 버려지고 더는 쓸모없을 것 같았는데, 종종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시면서 누구를 생각하게 하신다.
이해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 내가 나도 모르게, 그때 그 다급하였던 상황에서 주님! 하고 부를 수 있었던 게 은총이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리였다. 그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 부대끼며 끄달려 신음하고 답답해하였는지. 오후께 누구를 생각하다 문자라도 해볼까 하다 기도하였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습 1:14).”
그날이 오면, 내 안에 그처럼 담대하고 씩씩하던 용사가 슬피 울 것이다. 내가 그처럼 앙다문 입으로 기필코 바라고 원하던 것들이 아우성칠 것이다. 그게 다 허사였음을. 헛되고 헛된 것이었음을. 뭘 그렇게 애써 수고하며 기를 쓰고 사느라 기진하였던 것인지.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당도하고 나니 알겠다.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온 것 같은데, 참으로 가까운 날이었다. 여호와의 큰 날이라. 나의 하루하루가 그러하여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시 61:3-4).”
이제는 여기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 나의 피난처시라.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더는 저의 위로를 바라고 구하지도 않는다. 나의 견고한 망대시라. 늘 시의 적절하게 말씀으로 말을 거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자꾸 내게 말을 거시는 사이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관계라. 여전히 두렵고, 누구보다 어줍으며, 빙충맞기 이를 데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일쑤지만. 어떠하든지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결코 버려두시지 않음을 잘 안다.
무슨 책을 읽든,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든, 누가 사는 모습을 보든, 나무와 풀과 바람과 햇살이 모두 재잘거리듯 주의 소리를 전한다. 혼자 뚱하니 시무룩하다가도, 동기 전도사의 카톡에 올라온 글귀를 읽고는 짙은 한숨과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가 행하는 바, 뭘 그렇게 대단하여서 기를 쓰고 주의 목소리를 외면하기까지 열심인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내가 내세우고 자랑할 게 없어서 나는 이제 홀가분하다. 오히려 감사하다.
이룬 게 많은 사람은 참 어렵겠다, 하는 안타까움도 든다. 그 수고가 또 모진 애씀이 다 자기 의로 행한 바 의로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는 한 어림없는 일이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6-7).” 그러니 내가 복이 많다. 의롭다 하심을 거저 얻은 것이니 나는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내세울 게 없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같이 편을 이루는 무리가 없어서 다행이다.
오후께 혼자 드러누워 문득 이와 같은 만족함을 얻고 있었으니.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주가 하시고 주가 하신다. 나는 주께 고백할 따름이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3).” 그러니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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