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전봉석 2018. 2. 5. 07:26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편 63:3

 

 

 

밀려드는 여러 생각은 늘 그렇듯 마음을 들쑤셔댔다. 내 안에는 두 자기가 있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된 아담과 기어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다. 하나님으로 이미 충만했던 아담과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눈이 밝아진 아담이다. 사울이면서 다윗이다. 성숙된 어른이면서 여전히 어린아이인 자아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이다. 서로의 다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울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는 각기 주 앞에 서야 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같이 나가 점심을 먹고 올라왔다. 조금은 우울하였고 조금은 답답하였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음으로 나는 주를 힘입어 용기를 낸 다윗을 생각하였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나는 말씀에 대해 응답해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그러하다 해도 내가 있을 자리였다. 아니면 주가 거두실 것이라고,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우울하였지만 우울해할 것만은 아니었다. 속상하기도 하고 답답하였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어서.

 

신기하게도 그럼 그럴수록 주를 의지하는 수밖에 달리 더 좋은 수가 내겐 없었다. 더 나은 걸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뿐이어서 선택의 여지도 없는 셈이 된다. 때론 그게 참 다행이다. 경우의 수가 여럿인 까닭은 아직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어서이다. 이도저도 아닌 상태라면 머뭇거리겠지만 그럴 것도 없었다. 안 오든 못 오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주님께 맡길 따름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말씀으로 길을 여시는 하나님 앞에 앉는다. 누가 내게 말하길, 선생님은 차가운 사람이야! 하는 소릴 들었다. 아내도 종종 그리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리 여겨지는 것이어서 나는 종종 내가 그런가? 하고 되묻고는 한다. 연락을 먼저 잘 안 하는 편이고, 그만이면 그냥 그것으로 끝인 경우라는데 것도 나는 억울하다. 나는 늘 누구를, 수골백번을 생각한다. 마음이 쓰여, 쓸리고 까인 생각은 너덜너덜할 정도이다. 그러니 연락을 하는 게 나은지 놓아두는 게 나는지, 더 다가가는 게 나은지 거기까지 내버려두는 게 나은지. 수천 번은 묻고 답을 구하느라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군들 내 속을 알까? 성경은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신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선택해야 하는 일들 가운데 놓인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누구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에까지. 그러다보면 생각을 놓아두는 게 나을 때도 있다. 더 어려운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 나는 견뎌낸다. 누가 오고 안 오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마음이 쓰이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혼자 시무룩하였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누구를 생각함으로 시무룩할 수 있다는 건 은혜다. 저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건 은총이다. 마치 곯아떨어지듯 햇살 좋은 소파에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아내와 딸애가 서점에 들렀다 어디 갔다 오느라 뒤미처 들어오는 소리에 깼다. 어수선하였던 마음이 다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말씀이 마음에 들어온다.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앞에 두셨다. 선택해야 한다. 나와 내 자손을 위해, 주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 저를 의지하는 일. 그래 맞다. 두 마음을 가지고는 살 수 없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굳이 나에게 맡기지 않으시는 일에 대하여 시샘을 하듯 골머리 썩을 게 아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게 복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주신다. 그 기준은 이 땅의 부흥과는 무관하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누가 나왔으면, 같이 와서 예배를 드렸으면, 우리 교회로 좀 왔으면, 하는 생각과 생각이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선택은 가치에 대한 문제이고 이와 같은 갈등은 영적인 일이다. ‘너나 잘해’ 하는 이 말이 종종 나의 흔들림을 바로 잡는 중심추가 되었다. 한동안은 열등의식의 부산물처럼 공연히 나를 못 살게 구는 말이더니, 그럴 거 없다.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모든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인 것이지, 내가 이루는 구원이 아니었다. 속상하고 답답한 거야 그것으로 주께 고하며 아뢰는 게 일이니까 별 수 없고.

 

아, 오늘 말씀이 다시 보인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이시다. 나의 중심에 계시는 나의 구원자, 전능자이시다. 저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나를 잠잠히 사랑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

 

그러니 뒤이어 나오는 고백이 값지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곧 ‘내가 죽는다 해도 주는 인자하시다.’ 그러므로 주를 찬양한다.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나를 볶아대기도 몰아세우기도 벼랑 끝으로 몰고 가시기도 하는 것이어서. 때론 고달프고 답답하다가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하늘처럼 분명해진다.

 

하긴 어디서 읽었는데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것은 실제 나이에 맞게 성장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한동안 그런 소릴 들으며 살았더니. 이젠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는 말에 위로를 삼아야 하는 것인지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모든 게 다 지나가는 것이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두고 씨름할 건 없겠다.

 

나는 나의 우유부단함을 싫어하고 머뭇거림을 증오하지만 것도 지나가는 것이라. 애써 그것으로 몸서리칠 일은 아닌 거였다. 하나님은 모든 걸 다 시의 적절하게 하시는 분이시라, 나의 연약함을 아신다. 그래서 얻는 것은 더욱 주를 바라는 수밖에. 하나님만 바라고 말씀만 붙들고 나아가는 수밖에. 그러라고 끝끝내 그러라고 주는 결코 나의 기대를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돌아보면 나의 소망이 또 어떤 기대가 참으로 일시적인 것이었음을 곧 깨닫는다.

 

참 순종이란 순응이라.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는 게 성경의 여러 주의 사람이들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에녹의 동행은 말할 것도 없고, 노아의 무던함도 아브라함의 은근도 요셉의 끈기도 모세의 강인함도 다윗의 인내도. 그럼 그런 가운데 순응하는 것이어서 단지 막연한 운명론자가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이었다. 주님의 인자하심은 나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나를 죽이시더라도 저의 인자하심은 찬양 받으실 것이라.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이 단순한 한 구절의 말씀 안에 내가 어찌 행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무얼 붙들어야 하는지, 그 원리가 분명하였다. 집에 텔레비전이 고장 나면서, 적막강산이라. 나는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 무가치하게 떠들어대던 프로그램들과 아무 생각 없이 그 앞에 엎드려 있던 시간이 넉넉하여졌다.

 

불편한 게 도움이 크다. 넉넉함보다 모자람이 큰 힘이 된다. 쉬운 것보다 어려운 게 낫다. 성경의 원리는 그런 것이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다들 복에 겨워 흥청망청 구느라 자신의 영혼을 소홀히 할 때, 저의 더딘 걸음걸음이, 또 한 끼 무거운 밥숟가락이 복이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16).” 실망할 거 없다. 낙심할 일이 아니다. 오늘의 곤고가 나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으로 소망을 두게 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그러할 때 오늘의 찬송이 완성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되레 하나님이 나로 기뻐하신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2).” 그랬더니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값진 것이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 내 이 노래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