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학개 1:7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편 64:10
‘모든 영혼은 천성적으로 그리스도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다. 점심을 먹고 올라와 새로 주문한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살피고 있었다. 사장 부친이 건너와 차를 한 잔 대접하였다. 요즘은 우엉차, 생강차, 도라지조청차, 보이차, 유자차 등 덕분에 커피를 줄이고 차를 같이 마신다. 부친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계면쩍은 표정으로 ‘감사헌금’이라며 건네었다. 아드님 밑에서 일하며 처음 받은 월급에서 조금 덜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안 믿는 이의 그와 같은 행동이어서 나는 생각이 많았다. 물론 마나님이 믿음생활을 하고, 처가 쪽 일가가 믿는 사람들이라 해도 본인은 한사코 안 믿는 쪽에 서 있으면서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신기하였다. 그러니 누구의 말처럼 모든 영혼은 천성이 그리스도인인 게 확실하겠다. 그렇듯 보이차를 한 잔 마시고 휭하니 돌아서는 그에게서, 오늘 우리 교회를 여기에 두시는 이유를 또한 생각하였다.
공기가 차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정신과로 갔다. 평소 나의 담당의가 휴진이라 다른 이가 대신 진료를 보았다. 왜 자꾸 불안해하십니까? 혹시 그럴만한 원인이 있습니까? 저의 질문에 나는 뭐라 답을 하지 못했다. 언제나 ‘왜’라는 질문은 당혹스럽다. 나는 쭈뼛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저는 그냥 전처럼 처방을 하겠다며 약을 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응달진 바람이 얼굴을 에는 듯 차가웠다.
부친이 건넨 오만원의 감사헌금을 받고 기도하는 나와 안정제가 떨어져 의사 앞에 약을 처방받으러 가 앉아 있는 나는 서로 다른가? 평온하여서 늘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나와 아침, 점심, 저녁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불안에 젖어 생각이 많아지고 가슴이 뛰는 나는 서로 다른가? 찬 얼굴을 감싸며 나는 왜 불안해하느냐는 질문을 골똘히 생각하며 돌아왔다. 교회 안의 오후는 긴 햇살을 받아 후끈하였고 나는 몸과 마음이 노곤하여 피로하였다. 답이 없는 질문은 피곤하다.
새로운 책을 읽기에 앞서 저자를 살피고 저에 대한 이런저런 내용을 살피느라, 실제 본문을 읽지는 않았다. 책장을 휘리리릭 넘기며 자간과 행간을 살피면서 또 하나 생긴 습관이 있다면 요즘은 얼마나 말씀을 자주 인용하고 있나, 하는 것을 먼저 본다. 그러고 있는데 두 아이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추운데 갈 데가 없어서 40분만 있다가 가겠다며 싱겁게 웃었다. 과자를 내주고 차갑게 주스를 타주었다. 주일 날 아빠랑 어디 가느라, 엄마가 배가 아파서, 하며 아이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을 하였다. 늘 맹물 같은 나의 하루도 다채롭기만 하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7).” 행여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6).” 왜 그런가?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9).”
나는 누구에게 할 수만 있으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기를 권한다. 힘드네 어렵네 뭐가 어쩌네 하지만 싫든 좋든 주가 이루시는 걸 몸소 체험하며 사는 자리라. 뭘 하며 산들 고달프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다들 저마다의 수고와 애씀으로 자기의 밥상을 차리는 것이겠으나, 자기 집보다 주의 집을 지어가는 게 가장 현명한 것이어서 말이다. 자기의 행위를 살필 수 있는 삶이란 게 그리 녹록하지가 않은 게 또한 세상살이라.
세간에 한 여검사의 공개적인 고백으로 내남없이 ‘미투(Me too)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한 것이 세상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래서 직장을 구할 때도 기독교 관련된 일터를 딸애에게 권하는 것을 그 이유 때문이라 말해주었다. 술 문화가 주는 가장 원초적인 폐단이 성적 농락이니까 말이다. 남자끼리 있어도 음담패설로 이야기를 주도하는 게 술자리인데 하물며 여성이 끼면 의당 농지거리는 음탕해지고 음욕은 일게 되어 있다.
그러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이를 그나마 신중하게 살필 수 있는 자리가 교회고 하나님 앞에서이지 않겠나? 물론 것도 은밀하게 자행되는 일을 들춘다면, 그래서 그나마라는 표현이 적합한 것이기는 하겠으니. 또 보자. 다들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가운데 어떻게 하면 이문을 남겨 이득을 취할까 하는데, 이는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다.’ 신가하지? 많이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다.’ 괜찮을 줄 알고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다.’ 이제 와 느끼는 일이지만 세상에 눈먼 돈이란 없다.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것이 세상 이치다. 이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빨랐음이라.’ 참 신기한 노릇이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까지 지낸 이들이 돈을 은닉하고 곧 수명을 다할 터인데도 진실을 외면하는 까닭이 신비로울 뿐이다. 왜 그런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다.’ 감옥에 가 있느니,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내리며 지탄의 대상이 되느니, 나 같으면 없이 살아도 떳떳하였으면 좋으련만.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간단하다.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래서 나는 너무 애써 이 땅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데에 염려가 크다. 뜻을 세우고 이를 이루려는 넘치는 노력으로 나는 불안하다. 그러느니 ‘그나마’ 목사로 사는 혜택이 오히려 크다. 싫든 좋든 말씀을 붙들게 되고, 나는 순 엉터리지만 자꾸 누구를 생각하며 기도하게도 되고, 무엇보다 주의 집을 이뤄가는 데도 있게 된다. 아무리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위인이라 해도!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인가?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8).” 어렵지만 내가 이루려던 높은 산에 올라 나무를 가져다 성전을 건축한다.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유익하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전에 즐기던 말들의 즐거움을 이제는 추하게 여길 줄 안다. 더는 내 안에 이는 음욕과 음담패설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하면 주 앞에 더 바르고 온전할까, 생각하며 오늘의 처지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고자 한다. 더는 친구를 애써 바라지도 않고, 돈으로 돈을 삼으려고 기를 쓰며 살지도 않고, 지나간 날을 그리워하며 서글퍼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으며, 묵묵히 주어지는 한 날 한 날의 삶으로 순응한다. 순종이 순응이라는 말을 나는 이제 사랑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그 가운데서 주를 더욱 바랄 수만 있기를.
곧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달리 더 나은 게 없다. 수억 만금을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곧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 그날에 누군 감옥에 있고, 누군 자신이 가진 걸 숨기느라 급급하고, 누군 쾌락에 젖어 있고, 누군 자신이 이룬 출세와 성공에 만족하고 있다가 아뿔싸!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창 7:16).”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 행여 나의 나중이 어떠할지. 어떤 어려움으로 주를 모른다 할까. 육신의 고통으로 주의 사랑을 외면할까. 사람들의 이목과 저들의 안일을 부러워하다 주를 떠나지나 않을까. 나는 나를 확신할 수 없어 두렵다. 이 모든 일이 주의 긍휼하심 안에 놓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가 미덥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시 64:1).” 나는 다윗의 초조함을 이해한다. 저의 기도가 내 것이다.
그래서 기도한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2).” 나는 절대 안 그래, 하고 장담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주를 멀리하고 더 나은 걸 붙들 공산이 크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은총이 아니시면 나는 금세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6).” 아,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
그러므로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이제 나는 자랑하리니, 누구라도 빨리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를 지으며 자신의 헛된 건축을 중단하였으면 좋겠다. 마치 그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는 것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지만, 내가 지나온 삶을 보더라도 더 나은 인생은 없었다. 추하면 더 했지, 더러우면 더 더러웠지. 그러므로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오직 나는 이제 확신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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