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스가랴 2:5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조용하고 차분하였다. 마음이 가라앉아 주를 바라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동기들 방에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젊은 목사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혹시 주께서 살려주실까 하여서,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삼하 12:22).” 너는 저의 젊은 사모와 어린 세 자녀를 생각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저의 생명을 연장하여 주세요, 하고 기도하였다. 울고 싶은, 뭐라 말하기 힘든 내 속의 불편함이 일었다.
새로 구입해서 읽고 있는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내용이 느슨하여서 그 흐름이 자꾸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짜임과 규모가 장황하였다. 자주 시선을 잃고 먼 산을 보듯 앞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았다. 아무리 마음이 어떠니 해도 한 다리 건너의 일이라, 마음이 어려웠지만 막연하였다. 안타까움이란 얼마나 고상한 감정인가. 다시 읽던 책에 시선을 두고 애써 집중하려 외면하였다. 창가 쪽 화초들이 힘겨워하면서도 겨울을 견뎌내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 참 모질다.
마치 우리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으신 듯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들 시간표가 뒤죽박죽이라 점심때부터 띄엄띄엄 한 명씩 오는 바람에 네 아이가 오고가니 하루가 다 저물었다. 이런 애한테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나는 마치 의무를 다하듯 글을 쓰게 하고 쓴 글을 봐주고 뭐라 일러 보냈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 같아 기운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침묵인가 또는 외면이신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이를 위장하려 우리아를 끌어들여 저를 침실에 들이려 또 술에 절게 하며 궁리하는 꼴이 너무 야비했다. 이내 전장 깊숙이 몰아서 대놓고 살인을 모의한 부분에서는 몸서리쳐지는 두려움도 느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저를 아내로 맞아 일 년여의 시간을 능청스럽게 살아냈을 저의 일상을 상상하였다. 사람이 참 얼마나 야비하고 뻔뻔스러운가. 이내 나단의 비유와 그 말의 의도에 걸려 회개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어찌 풀어서 아이들에게 전해야 할지.
다른 본문으로 넘기려는 데도 마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더더욱 어려운 하루였다. 그게 어떤 건지 잘 안다. 모면하려 들면 들수록 더욱 초조하고 비굴하여져서 사람의 본성은 꾸며지고 덧대어져 핑계 위에 핑계를 더하는 법이다. 스스로 정직하기란 불가능한 게 죄의 속성이다. 인정하기 어렵고, 인정하면서도 모면할 길을 모색하느라 스스로 망각의 늪으로 걸어 들어간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스스로의 양심도 외면하려 드는 것이다.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 또한 ‘나 역시 다를 바 없지만’ 하는 식으로 ‘그런데 네가 더 나쁘다.’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미투 운동’이 그래서 낯부끄럽다. 반론에 재반론이 이어지고 폭로에 재폭로가 가해진다.
천하의 다윗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서 위로를 얻는다면 우스운 소리지만, 여러 번 그 본문을 살피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작고 보잘것없는 마음에서 그처럼 끔찍하고 어마어마한 죄악에 이르는 마음에까지는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저의 첫 번째 오류는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삼하 11:1).”
이웃하고 있는 암몬 땅의 왕이 죽었다. 저를 애도하려 사람을 보냈다. 한데 이를 염탐하러 온 것으로 오해하여 저들을 능멸하고 모멸감과 수치를 안겼다. 전쟁이 발발하였다. 암몬은 주변국으로부터 용병을 끌어 모았다. 다윗은 누이 스루야의 아들 요압에게 전쟁을 맡기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다. 그뿐인가? 저녁 때 옥상을 거닐다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도 그대로 있었다. 마음에 이는 음욕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두 번째 저의 실수는 ‘보내었다.’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3, 4, 6, 12, 14). 다윗은 저 여인이 누군가 알아보려 사람을 보내고, 보내어 데려오게 하고, 임신이 되자 이를 모면하려 또 전쟁터로 사람을 보내 저의 남편을 오게 하고, 보내어 더 깊은 전장으로 몰아넣었다. 한 번 뿌리치지 못한 마음을 덧대어 가는 과정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사람이 그 내면의 어떤 욕구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보여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문득 바울 사도의 이와 같은 말씀이 실제로 다가왔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나의 동기 목사의 사투와 그 곁을 지키고 있을 저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어려웠다. 그러니까 축축 가라앉는 내 마음이 실은 얼마나 거짓스러운가 생각하였다. 기도할게요, 하고는 나는 과연 절실하였나. 내 안에 이는 안타까움이 얼마나 막연하였던가. 실제 그 상황이 내 이야기가 아니어서 말이다.
다윗의 처신이 오버랩 되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지? 하고 회의하다 그럴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데 치가 떨렸다. 그런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말이다. 내 기억으로 나 역시 누군가를 성희롱한 게 수두룩하고 성추행을 한 적이 어디 없었던가? 오히려 참혹할 정도로 비일비재했던 것인데 마치 나는 고결한 척 누굴 능멸하고 비난한다. ‘나도 다를 바 없지만’ 하는 정도의 한 다리 건너에서 입방아를 찧는 일이 참으로 가소롭다. 다윗에게 어떤 환멸을 느끼다, 이런 내용들까지 구구절절 성경으로 옮겨 적으신 목적을 묵상하였다.
지금 어디쯤에서 다윗은 내가 저에 관한 이 내용을 읽고, 저의 수치를 나의 부끄러움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텐데. 문득 드는 생각은 심판이란 그와 같이 짊어져야 하는 부끄러움이 아닐까?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 발을 씻으라, 하는 그 너그러움 뒤에 감춰진 부끄러움.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삼하 11:8).” 그리기엔 우리아의 충정이 너무 과했다.
그러자 다음 날에 또 다윗은 술을 먹여 위로하는 듯 저를 취하게 할 때의 그 부끄러움.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13).” 결국 그 마음의 부끄러움은 도를 넘어서서 저를 죽이게 된다.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15).”
나는 내 안에 이는 안타까움의 무게를 가늠하였다. 기도할게요, 하고 돌아앉아 과연 얼마나 절실하였나 생각한다. 그저 막연하여서, 돌아와 아내에게 그와 같은 얘길 건네며 아무래도 어렵겠어, 하는 나의 말의 뻔뻔스러움을 이제야 느낀다. 같이 기도하며 저를 주께 아뢸 때의 그 막연한 슬픔의 정도를. 그러니 우린 얼마나 능글맞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주께 고한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 이를 정하게 하실 이는 주밖에 없으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그러니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 용서도 사죄도 모두 주의 것이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솔직도 정직이 될 수 없다.
오늘 말씀에서 이를 둘러싼 ‘불의 성곽’을 본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주의 영광이 있다. 기어이 우린 ‘땅의 끝에서’ 주를 경외함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시 67:7).” 이제는 가장 두려운 말이 ‘갈 데까지 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서 다 살고서야 그 끝에서 주를 경외함이라니! 생의 끝자락에 매달린 아직 어린 사모와 세 아이를 생각한다. 나는 자꾸 까부라지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절박함으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1).” 그럼 모든 게 끝장이란 걸 안다. 나는 무섭다. 누워 있는 저가 나여서, 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주를 원망할까 무섭다. 이를 지켜보며 곁을 같이하는 이로서, 나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주를 저주할까 두렵다. 어린 세 아이의 기도가 얼마나 다급하고 간절할지, 목이 멘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14).” 다윗의 절규하는 기도가 들리는 듯하다.
곧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슥 2:13).” 함부로 생각하고 말하고, 누구를 대하고 다스리려 들던 나의 나날이 부끄럽다. ‘나도 다를 바 없지만’ 하고 시작하여 누구를 욕하고 꾸짖고 저주하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유난히 발끈하는 위인은 그 속에 더 큰 화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가타부타 쪼아대는 댓글을 몇 개 읽다 치를 떨었다. 금세 흙탕물이 되었다. 용기를 내어 고백한 이나 지목당해 평생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어느 시인의 비통함이나. 누군들 주 앞에서 스스로 정할 수 있을까?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더럽고 역겨움뿐이지만, 주여 나의 입을 열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 위에 주의 구원을 알리게 하소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고백하며, 그 고백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의 고백으로써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살려서 그 생명을 연장하심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만천하에 증거 할 수 있게 하시기를. 부디 저의 젊은 처와 어린 자식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나의 한 날이 주 앞에 온전하여지기를.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18).” 주의 은혜만이 살 길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67: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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