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스가랴 3:10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시편 68:4
‘혜성같이 나타났다’는 표현은 누가 극적인 상황에서 도드라진 업적을 이룰 때 종종 쓴다. 가령 성경에서 예를 들면, 다윗이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리는 경우와 같다.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하는 굳은 확신이 저절로 뚝딱, 생겨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저의 손에 익숙하였던 것, 더욱 훌륭하였을 사울의 갑옷보다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49).” 그러니까 다윗의 그와 같은 용기와 결단과 평소 익숙하게 몸에 밴 동작이 한데 어우러져 나타난 것이다. 흔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이들의 특징으로 말끝에 습관적으로 붙은, ‘주여’ 하는 감탄어구와 같이 말이다.
의식을 하고 결단을 하는 일은 쉽다. 그것이 몸에 배기까지, 몸이 기억하여 판단과 동시에 또는 먼저 판단을 도울 정도로 능숙한, 습관 같은 것을 성경에서 이르는 열매 또는 성품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단시일에 뚝딱, 생겨나지 않는다. 몇 번 해보고 아는 게 아니다. ‘생활의 달인’이란 늘 한결같음이 반복되어 제2의 천성으로 몸에 밴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대하는 일에 가장 고난이도의 수고는 기다림이다. 인내가 없이는 아이를 상대할 수 없다. 한두 번 말해서 들을 일이고 고쳐질 거라면 이렇듯 씨름할 것도 없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많이 코치를 받는다. 모든 과목에 학원을 다니고 소위 전문가 그룹에 맡겨져 저들이 일궈낸 요약본과 예상문제에 의존하여 성적을 끌어올린다. 단시일에 성과가 없으면 부모는 초조하여 얼른 다른 학원을 물색하고, 새로운 코치에게 아이를 맡긴다. 너무 손을 탄 아이는 자주적인 판단력이 없다. 누가 뭘 시키지 않으면 할 줄 모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아이와 길게 대화를 했다. 나는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기장 ‘설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2009년 1월 15일, 새떼들로 인해 엔진이 정지되었을 때 저는 850미터 도심 상공에서 여객기 안에 있는 155명 승객들의 생명을 담보로 208초 안에 선택해야 했다. 저는 평생을 비행기 조종사로 살았고 손에 익은 훈련을 매일같이 반복하며 지낸 노련한 기장이었다.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반복과 반복이 이어져 급박한 상황에서 과학도, 누구의 유능한 코치도, 또는 조력도 구할 수 없이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동시에 행동하여야 했다.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과연 이해하였을까? 일반 고등학교에도 가네 못 가네 하며 허둥거리다 간신히 인문계 고등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누구는 다른 아이들 내신 밑바닥을 깔아주러 가네 어쩌네 말들이 많아, 실제 저의 중3 담임은 그럴 바에는 ‘특성화고등학교’에 가서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고 하였다. 부모도 그리 판단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여전히 충분한 가능성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느 시절보다 지구력 부재의 땅에 살고 있다. 조금 해보다 아니면 그만두는 게 다반사다. 그게 어디 아이들만의 이야기인가. 이틀이 멀다하고 간판이 바뀌고, 내부인테리어가 바뀌고, 업종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일이 바뀐다. 건물은 뜯었다 붙였다 생채기투성이다. 거기에 겉만 번드르르하게 새로운 필름을 입힌다. 감쪽같은데 그래서 늘 익숙하지가 못하다. 소위 ‘장인’이란 표현을 붙이는 경우를 보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꾸준함이 우선이다.
아이의 허황된 계획이나 꿈을 듣다, 혜성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만의 반복적인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말해주고 싶었다. 성령의 열매란 하루아침에 뚝딱 열리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어째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수 없는 것일까? 실제 그리스도인으로 주와 동행하는 사람치고 주와 동행한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사람은 없다.
묵묵히 어제 하던 것은 그제 하던 것으로 오늘도 묵던히 준행할 뿐이다. 아이에게 말해주다 내가 더 은혜를 받았다. 누가 보든 안 보든, 가령 묵상글을 쓰는 일도 써야 해서 또는 어떤 이유로 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한다. 그 시간이 되면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말씀을 읽고 저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들리는 것을 붙들며 전날의 일을 돌아보고 오늘도 주가 함께 하실 것을 바라는 일이다. 늘 같은 동선을 따라 같은 시간에 움직이며, 교회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익숙하게 된 것이다.
하물며 생활의 달인이라는 저들도 그렇고 보면 모든 직장 생활도, 장사하는 일도 남다를 게 없는 것이어서 무던함이 어느새 제2의 천성이 되는 것이다. 성격은 타고 나도 성품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한 번 두 번 되풀이 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인격을 만들어서 운명을 바꾼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종종 나는 꿈을 꾸기를 함께 예배를 드렸던, 드렸으면 하는 아이들과 사람들로 와글거리는 글방을 본다. 특히 주일 날 아침이면 그와 같은 상상을 하며 같이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꿈꾼다.
아침마다 건너와 차를 대접하고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한 노인의 너스레도, 늘 소극적이어서 시키지 않으면 도무지 하려고 하지 않는 의욕이 상실된 아이와의 수업에도, 그리고 금요일이면 종일 들어앉아 설교 원고를 새로 작성하면서도 ‘이걸 왜 또 새로 해야 하지?’ 하는 의구심이 나를 후벼 파듯 찔러대도. 그럼에도, 그래서, 그러니, 뭐라 할 말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또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어느 훗날,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슥 3:10).”
누구는 그 초대에 응하고 누구는 끝내 거절을 하는데,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어째서 그런가? 저들은 다만 저들에게 익숙한 길로 가는 것이다. 몸에 밴 것이 편하니까, 전혀 그 다급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나는 아이에게 기껏 말하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주일에 보자! 하고 초대를 했더니 ‘종교적인 건 아무래도, 믿지도 않는데, 제가’ 하면서 아이는 얼른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허무하다는 표현은 이런 것일까? 두 시간 가까이 서로 이런저런 얘길 하며 결국은 바라던 것인데, 기껏 했던 말들을 도대체 어디로 듣고 흘린 것일까? 그러니 단시일에는 안 된다. 억지로는 안 된다.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다, 어쩔 수 없음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 어쩌겠나? ‘덜컹거리면 그 안에 담긴 게 흘러넘치게 돼 있다.’ 평탄할 때야 누가 알겠나! 다 똑같은 것 같은데, 나는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기 목사를 생각하며 저가 과연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붙들고 있을까 궁금하였다. ‘말씀 붙들고 힘내시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었다. 평소엔 말씀은 봐도 안 봐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덜컹거리는 순간’에 보면 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할 만큼 가장 말을 안 듣는 게 우리 몸이다. 내 의지다. 옹고집 같은 것이어서 강제로 힘을 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삐쭉, 아이가 그리 말을 남기고 사라진 뒤 나는 허탈하여 비틀거리다 그럴 거 없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말씀을 본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시 68:4).”
주가 이루신다. 주 앞에서 뛰놀지라. 성품은 타고 나는 게 아닌 것이어서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7).” 곧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주의 약속을 붙들고 가는 것이다. 죽이시더라도 주는 선하시다. 내 기도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신다 해도 주는 옳으시다. 주의 약속은 정직하시다.
나의 의지와 노력은 더러운 옷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곧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5).” 주가 하심을. 하실 것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가실 것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9).”
가장 황당한 사건은 내가 주를 바라는 사람으로 돌려세우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일만큼이나 기적이다. 누구보다 나는 안다. 나 같은 자도 초대하셨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10).” 말씀 붙들자. 말씀만 붙들자.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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