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전봉석 2018. 2. 12. 07:31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스가랴 5:11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70:4

 

 

 

시날 땅은 니므롯이 건설한 첫 왕국을 지은 땅이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창 10:10).”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다. 저는 세상의 첫 용사, 용감한 사냥꾼이었다(8-9). 사람들은 그 위에 바벨탑을 쌓았다. 스가랴는 여섯 번째 두루마리 환상을 본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슥 5:3).”

 

저들은 성전 건축에 태만하였고 이에 속히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4).” 그리고 이어지는 일곱 번째 환상은 곡식을 담아 재는 측량 그릇 에바에 여인을 가둬 납으로 봉한다.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8).”

 

날개달린 두 여인이 에바를 옮겨갔다(9-10). 그곳이 시날 땅이었다. 그것을 위해 집을 지어 그곳에 머문다. 우상의 땅이다.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았다. 여러 번 읽고 해설을 읽어보고 이해를 했다. 태만과 안일함에 따른 기록이 상세히 적힌 두루마리가 무섭다. 이를 측량하여 봉한 곳은 시날 땅 니므롯이 건설한 왕국, 바벨의 성이다. 이 땅의 죄악 됨은 스스로들 알면서도 이를 또 희화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유희의 도구로 삼는다. 영화, 음악, 각종 캐릭터들이나 인기상품이 되어 팔려 다닌다.

 

아찔한 노릇이다.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 주를 알고 바로 믿는다는 일이 적대시되는 것을 알겠다.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2).” 주께 아뢰며 구할 수밖에 없다. 나를 조롱하듯 비웃는 것 같다.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3).”

 

아이들이 온다고 했고, 우리는 같이 오후에 양떼목장을 가기로 하였다. 어떤 계획을 세우면 보란 듯이 어그러지는 형편이라, 내 안에 이는 회의는 아하, 아하 하며 우롱하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싸해? 약은 먹었어? 예배 시작할 때랑 끝날 때 너무 티가 나! 아내는 예배가 끝나고 걱정을 하듯 말하였다. 의연할 수 없는 나의 본심을 아무리 감추고 안정제로 진정시키려 해도 그렇게 티가 다 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아이들이 몰라서 그렇고, 그 부모가 믿지 않으니 그런 가정에서 아이 또한 의지대로 주 앞에 나올 수 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럼에도 그래서 교회를 이뤄가야 하는 데는 그 목적이 선명한데,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회의가 또 갈등이 나를 시무룩하게 하는 것이다. 골이 난 사람처럼 어떤 말도 하기 싫고 누구도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우상의 땅에서 나는 조롱당하듯 보기 좋게 실의에 잠겨 있을 때, 오늘 아침의 말씀이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

 

나로 주를 찾는 기쁨과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내 이야기로, 나의 고백으로 읽는다. 아내와 딸애는 멀쩡한데 나에게 말해주듯 기도하였다. 그럼에도 그래서 교회를 이뤄가는 이 일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고 의지하며 꿋꿋하게 나아가는 일이 되게 하소서. 그러니 내가 누굴 의지할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5).”

 

‘예배하는 일. 청지기직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 주의 향기로 편지로 살아가는 일.’ 이 세 가지는 내가 살아서 남은 생을 다하는 날까지 잃지 말아야 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별별 생각을 다 하는 게 나의 못난 속성이라, 교회보다 글방으로 다시 등록을 하고 다만 얼마라도 교육비를 받고 밥벌이를 하면서 어차피 예배는 이처럼 가정예배식으로 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 늘 속삭인다. 그럼 또 그게 합리적인 이유가 온통 머리 가득 찬다. 그런데 기쁨은 없다. 셈이 는다.

 

이럴 때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묵상하지 않으면 금세 삶의 주객이 전도된다. 이내 나의 확신은 주어진 사명에 따른 것이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사 61:6).” 그럴 거였으면 굳이 하나님이 나를 돌이켜 목사로까지 삼으시지는 않았을 터. 합리적인 판단보다 말씀을 소원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괜한 소신이 아닐까 우려하면서도 시련이라.

 

나를 가장 못 살게 구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런 내용을 아내나 딸애에게도 말할 수 없어 어쩔 때는 너무 외롭다. 저들이라고 알겠나?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이 땅에서의 합리적인 길을 모색하기 마련이고, 그럼 어떤 걸 지지할지 빤히 그려볼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나는 제사장이라. 하나님의 봉사자라.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개개의 삶이 결코 별개의 것은 아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접어도 주가 접으시게, 거두어도 주가 거두시게 해야 한다. 끝 간 데 없는 나의 생각은 저 혼자 다른 길을 모색하느라, 오후 내내 뚱하여 말이 없었다. 시무룩하니 이젠 아내도 딸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만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혼자 외로웠다.

 

외롭다는 말을 말로 쓰는 것에 주의한다고 하느라 입에 담지 않으려 애쓰지만 것도 다 티가 나는 일이라. 그러는 동안 나는 과연 거룩할까?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그러하여서 나는 더욱 주를 바라는 것일 텐데, 부디 나의 마음이 손상되지 않게 하시기를. 지금 이 곳이 가장 절묘하고 아름다운 처소가 되기를.

 

내가 누구를 생각하는 일은 참으로 사소하여서 별 것 아니라 해도, 같이 와서 예배드리고 주를 바라며 함께 저 본향을 향해 나아갔으면, 하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또 생각이 누굴 떠올리게 하고 그 이름을 적고 저에 대한 궁금함을 주께 아뢰며. 생각하기를 나의 마음은 참으로 사소한 것이나 그러는 동안 나의 자세를 고민한다. 늘 한결같을 수 있기를 바람이다. 여전하다는 말, 그 말이 곧 주를 바라는 기준이 되고 푯대가 되어 저들이 길을 잃었다가도 나와 우리 교회가 여전한 것을 보고 알게 하시기를.

 

생명나무가 자라는 곳,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나의 생각은 너무 야무져서 저 혼자 뭐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 생각으로 누구를 떠올리며, 돌아올 때를 생각한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3-4).” 주를 바라고 의지한다는 일은 때로 무모하고 황당하기까지 하여서, 나는 내가 제일 힘들다. 나를 다루고 설득하고 이끌어 다시 기운을 내는 게 가장 어렵다. 똬리를 틀고 안으로 감겨버리는 나를 나는 이겨낼 방도가 없다. 주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일,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나는 죽었는데 나는 살았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7).” 범죄 가운데 있던 나를 돌아보면 오늘 우리 아이들이 교회로 나올 수 없는 그 처지를 나는 잘 안다. 그럴 수 없는 그 상황을 말이다.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 이유도 안다. 다 자라 머리가 굵어 더는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완고함에 대하여.

 

하지만 엄연하고 분명한 사실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주가 이루실 것이다. 나를 오늘 여기에 두신 것과 같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로라도 나는 마땅히 예배를 지켜야 하고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

 

곧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 그런즉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