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전봉석 2018. 2. 14. 07:29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스가랴 7:6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내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할 때 하나님은 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내가 하나님으로 만족할 때 하나님은 나로 영광을 받으신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듯 묵상하고 되새겼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와 같은 앎은 막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일상에서 실제의 것이었다. 곧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아이가 혼자 수업을 왔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또한 그 손에 감사헌금까지 들려 있었다. 아이의 조부는 다 저녁께 선물세트를 하나 들고 오셨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이끄심이 나를 송구하게 하였다. 친구가 명절에 앞서 잠깐 들르겠다고 하더니 퇴근길이 너무 막혀서 돌아갔다. 아이들과 같이 치라고 기타와 주전부리 과자도 한 박스 사두었다고 하였다. 그렇듯 서로 마음을 쓰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었다. 교회여서 내가 교회 안에 있으니까 그 모든 손길은 주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로 인해 오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일이다. 환경이나 어떤 조건이 아니라, 이를 잊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은 나를 돌보신다. 아, 그 만족을 추구하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이는 명령이셨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와 같은 기쁨은 여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결과를 아는 데서 여건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소원을 주께 두는 것이고 그 마음이 주로 만족하는 일이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화였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신 28:47-48).”

 

나의 결의와 형식이 아니다. 헌신이 미신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인위적으로 주의 사랑을 받으려는 마음이 거짓되다. 만족은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 슬프고 고달프고 화도 나고 속상한데도 주만 바랄 수 있는, 이상한 마음이 만족함이다. 욥의 고백처럼 나를 하나님이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일, 믿음이란 그처럼 구체적이면서도 확실한 결과였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딸애에게 뭐라 한 소릴 했다. 그냥 다 좋다, 네가 좋다고 하면 나도 좋다, 하고 응원하고 지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어서 말이다. 결혼은 또 다른 나와 또 다른 너를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일이다. 연애 때는 그게 다 환상 속에 감춰진다. 낭만이 사로잡은 것이다. 좋은 것만 보이고 좋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 결혼의 대상을 고를 때 유년시절 자기 부모의 반대적인 성향에 끌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연애 때 비춰진 저의 겉모습이었을 뿐이다.

 

결혼과 동시에 드러나는 배면은 저의 환상적인 모습 뒤에 내 유년에 익숙한 부모로부터의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마련이다. 신혼 때 그처럼 자주 싸우거나 냉랭하게 식어버리는 마음이 그래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들이 나를 대하던 그대로 자신이 자신을 다루고 있었다. 또한 그 모습을 감추고 연애를 하다 결혼과 동시에 배우자에게서 숨었던 나의 모습이, 어릴 적 나의 부모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발견되는 것이다. 곧 서로가 끌린 것은 정작 그와 반대의 모습이었다고 여겼는데 실은 그 본질적인 숨은 모습이었다.

 

유년의 나를 대하던 부모처럼 성인이 되어 자신을 돌보던 게, 결혼과 동시에 배우자에게서도 그와 같이 부모의 모습으로 대하는 퇴행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고 이해와 지지를 원했던 결핍의 정도만큼 배우자에게도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바라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이는 하나님께 향한 죄로 인한 결핍이다. 결국은 저가 나의 만족을 채울 수 없다는 데 이르면서 다툼도 나고 오해와 증오도 인다. 원죄적인 요소다. 스스로 애썼던 만큼 배우자에게도 그리 원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서 읽은 내용처럼 ‘결혼하려는 감정은 흔히 어린 시절에 겪은 고독감과 밀접하다.’ 그 보상의 대상으로 상대의 친절과 끌림이 호감이 되어 ‘아빠 같이 완고하지 않은 남자’ 또는 ‘엄마처럼 유약하지 않은 여자’를 원하여 연애도 하고 사랑을 하였지만, 결혼과 동시에 베일이 벗겨지듯 실제 저의 숨은 모습은 ‘아빠보다 더한 완고함’이었고 ‘엄마보다 심한 유약함’이었다. 나는 그 부분에서 크게 공감하였다. 딸애가 만나는 아이에 대해 뭐라 서술하는 것은 부적합할 것이다. 그저 딸 가진 아버지의 마음으로 치부하기에도 너무 고약한 마음이지만.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조금만 뭐라 하면 금세 울어버리는 딸애 앞에서 나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충분한 지지를 못해주는 것 같아 미안하였다. 나는 내 안에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딸애가 출타를 하고 시무룩하니 있을 때 하나님은 마치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듯 나를 위로하였다. 돌아보아 주만 바라게 하시는 마음을 주시는 거였다. 왜냐하면 악함이란 결국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2-13).” 언제부턴가 어떤 의미에서는 결혼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로와 기쁨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주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을 섬기는 일은 단지 이상적인 구호가 되었다. 실은 하나님 없이도 좋은 배우자로 서로를 원하게 되면서 우리는 연일 선악과를 서로에게 권하는 셈이 된 것이다.

 

생수를 마다하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꼴로 결혼을 꿈꾸는 시대가 되었으니, 현실도피로 또는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구로 삼는 것이다. 그랬던 게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였으니 그 삶이 더욱 곤고할 따름이다. 벌써 1년이 되었다. 작년 이맘 때 오랜만에 연락이 되어 찾아왔던 아이가 있었다. 어느새 아이 셋를 둔 가정주부였고, 저의 신랑은 나보다도 나이가 많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위인이었다. 저 아이의 심정이 딱 그러했다. 부모의 폭압과 잦은 참견을 견디다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 많은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하였다.

 

저는 친절하였고 배려심이 깊었다. 뭐라 해도 다 받아줄 것처럼 품이 넓은 남자였다. 곧 자신이 어릴 때부터 늘 꿈꾸던 환상 속의 그런 인물이었다. 열여섯 살의 나이 차이는 대수도 아니었다. 도망치듯 결혼을 하였는데 곧 서로의 숨은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저는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자기 부모의 모습보다 더욱 고약하였고, 자신을 향한 저의 깊은 토로도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인 줄 알았는데 지극히 소극적이고 소심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서로를 아는 데는 채 3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혼도 생각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시도하였을 정도라니까.

 

돌이켜 주를 바라고 참 회개가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모든 걸 다 내어준다 해도 잃을 수 없는 기쁨과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더는 어떠해도 상관없는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도 결국은 그런 것이어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이 땅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데서 금식과 성결을 도모하는 데 대해 오늘 본문은 환멸을 깨닫게 하신다. 우상숭배와 같은 마음으로 인위적인 자기 수고의 하나라면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신다. 곧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한 자의 애씀이어서 헛되다. 결국은 그러한 게,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 7:6).” 그래놓고는 자긴 할 걸 다 했다고 여기는 마음이 악하였다. 자기만족은 결국 터진 웅덩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어떠하든지’ 나는 주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주를 통해 나의 만족을 추구하려는 게 아니라, 나의 만족으로 주만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는 본심이나 주를 바라는 신앙의 정도가 ‘여기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나는 그것으로 구하고 바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안 아프게 해주시기를 빌고,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고 구하는 것일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앞에 오늘을 아멘 하는 삶이어야 한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그의 이름이 나의 사는 날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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