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전봉석 2018. 2. 18. 07:24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

스가랴 11:17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시편 76:7

 

 

 

아이들을 외면하고 더는 상관하지 않겠다, 할 때 나의 마음이 심히 괴롭더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슥 11:4-5).” 서로 다 자기 기준으로 옳다 하니 이를 두고 오늘 스가랴는 그 이유를 알게 한다.

 

내 안에 두신 마음이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7).”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와 연합이라 하는 막대기, 이 둘로 양 떼를 먹일 일이다. 내 안에 두시는 이런저런 마음이 주의 은총을 사모하게 하고, 어찌됐든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게 연합이었다.

 

설날이 지나고 토요일, 나는 혼자 종일 글방에 있어 책을 읽었다. 아내와 딸애가 집에서 나오기 싫다고 해서 덕분에 말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외롭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없고 고독하지 않고서는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없다. 어울리는 이가 많고 의지하는 게 있다 보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절실함은 덜하다.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읽으며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의 ‘성취’를 이해할 수 있었다.

 

흔히 팔복이라 하는 축복의 원리도 다시 생각하였다. 축복은 행복의 개념과 다르다. 행복은 내가 이루어가며 그러기 위해 추구하는 가치라면 축복은 주어지는 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있는 게 달랐다. 곧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미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오늘 주를 바라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기쁨과 충만함으로 죽음 너머의 천국에서도 이어진다. 그것을 맛보아 아는 일이다. 지금은 비록 희마하나 그때에는 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는 곧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방식이고, 하나님으로 마음먹는 일이며,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생활로 드러나고 이어진다. 혼자 들어앉아 지겹도록 외롭고 답답하다가도 그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이와 같은 말씀으로 동의하고 기뻐하며, 밑줄 긋고 메모하면서 하루를 꼬박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었다.

 

더는 무료한 게 아니고, 더는 정체된 마음도 아니다. 흔히들 같이 어울리고 더불어 무얼 확장해야 사람다운 삶으로 간주하는 모양인데, 그런들 정신이 팔려 어떻게 묵상이 가능하겠으며 무슨 수로 주님만을 바라며 설 수 있겠나. 옳다 그르다는 것을 떠나 왜들 광야로 나가고 수도원에 들어가 묵언수행을 하고 면벽수도를 하였는지 알 것도 같다. 그와 같은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일이라면 의미가 있었겠다 싶은 것이다.

 

전체 층이 다 조용하니 텅 빈 사무실 공간에서, 나는 그 의미를 이렇게 메모하였다. ‘이미 여기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중에 거기서도 임하는 일이다.’ 오늘 여기에서 주의 임재를 누리며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일이라면 그곳에 이르러서는 이를 더욱 확장하여 중심적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겠다. 누구에겐 무료하고 누구에겐 재미없을 것 같은 일인데, 누구와 누구의 것과는 별개로 은총이라는 막대기로 우선한다. 이를 깨달을 때 연합이라는 막대기로 쓰임을 받는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다다랐을 때 평소 이루어오던 이 삶은 연장된다. 이 땅에서는 애통하고 심령은 가난하며 박해당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나 이 모두는 보장이 된 축복이라. 위로를 받는 곳이고 최종적으로 배부른 곳이며 영광이 영광으로 더해지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다. 이를 오늘 맛보아 알았다. 아, 그렇구나! 참 좋다! 하고 느낄 수 있는 은총과 누릴 수 있는 연합이다. 이를 알려주려, 나는 나의 감정과 싸운다. 내 안에 쉬지 않고 이는 허튼 마음들과 정쟁한다. 이 땅에서는 이와 같은 긴장감이 늘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창조의 삶이고 새 언약의 삶이며 새로운 삶의 지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저가 오셨고 함께 계셨으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이미 이 땅에서도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나중을 위한 은총의 상이 아니라 이미 주신 바 되어 오늘에서 벌써 누리는 연합의 상이었다.

 

이를 알 때 확실히 다른 삶이 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 그 역할과 본분을 말이다. 왜 그래야 할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그러라고 아직 세상에 두시고, 그러기 위해 오늘까지 이 땅을 유지하고 계신 것이다. 온전할 수 있고 온전하여야 한다는 사명.

 

온전함이란 구호가 아니라 실제다. 추상이 아니라 적나라한 현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나의 나 된 모든 것을 나눠주고 내버려둔 채 주를 바라는 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그러니까, 돌아보면 안 해도 될 말 때문에 후회가 있다. 해놓고 나서야 이를 깨닫기 일쑤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더욱 주를 의지한다. 나는 안 된다는 말로 주 앞에 엎드린다.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주 없이 살 수가 없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비결은 그렇지 못한 나를 자꾸 마주하는 일에서다. 공연히 발끈하고, 무슨 말에 서러워하며, 누구의 처사에 마음 쓰이고, 혼자 있으면서도 여전히 혼자 있지 못하는, 이 땅에서의 어쩔 수 없음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4-5).”

 

하루의 해가 길면서도 짧았다. 책을 보다 몸을 풀 듯 청소를 하였고, 지루하면 가만히 차를 데워 창밖을 내다보며 마셨다. 정말 조용하고 고요한 토요일 오후였다. 오후께 동기 목사의 근황을 알리는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항암치료로 삭발을 하고 이불을 감고 로비에 나와 앉은 것인지, 휠체어에 앉아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가슴 짠하였다. 그래서 그랬는가, 꿈에서도 저를 위해 몇몇이 모여 기도모임을 하다가 잠에서 깼다.

 

병든 이의 모습을 보면 각성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병들었으나 다들 아닌 척 하고 산다. 아픈 사람이 없다. 거짓으로 가장 부패한 게 우리 마음이지 않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책을 읽다, 말씀 앞에서, 누굴 생각하다, 어느 순간에, 문득 나를 향하신 주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어쨌을까? 아찔해지는 것은 설령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의 병든 영혼을 애통해할 때, 이를 위해 주가 오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내 안에 늘 들끓고 요란하기 그지없는 불평과 원망과 서러움과 낙심을 어쩔 줄 몰라 하며 고통스러워할 때, 내가 여태껏 살면서 나보다 죄악 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괴로워할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나를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슥 11:17).” 이를 알면서 내가 어찌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곧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축복이었다. 내 안에 이는 온갖 시궁창 같은 마음을 부끄러워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 안에 이는 나를 향한, 죄를 향한 노여움이 주를 찬송하게 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10).” 그리고 더는 죄에 얽매어 살지 않는다. 주께서 고치시고 씻기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듣고 사모하는 자의 회개로 이뤄진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9).”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주님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주일 날 아침. 나와야 할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으면 하는 이들을 두고 생각하기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3-4).” 은총에 이은 연합이었다. 내가 주와 온전히 하나가 될 때 나에게 또한 접붙이심을 통해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은 언약을 새롭게 하실 이가 주님이시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전에 것은 지나갔다. 그 날 후에 주의 법을 내 속에 두고 내 마음에 기록하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저의 백성이 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제 나의 남은 날들이 그러하기를.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30:6).” 그로 인하여 나는 남은 생을 산다. 곧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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