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스가랴 9:16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혼자 있는 데 익숙해져서 같이 있는 게 어려웠다. 마음과 상관없이 몸이 일찍 반응하였고, 마음은 상관없이 혼자 외따로웠다. 오전에 일찍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 통화도 하였다. 이처럼 아침에 일찍 올라와 묵상글을 교회에서 쓰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기를 쓰고 새벽예배를 나가던 때가 생각났다. 운전을 하고 십여 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니까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주께 돌아서면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 이와 같은 수고였다. 어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끙, 하고 몸을 비틀며 돌아 누울 때면 주를 부른다. 알던지 모르던지 우리는 부지불식간에도 기도를 하고 사는 것이다. 그 대상이 저들은 막연하나 우린 단일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만 나의 주가 되심을 아는 일. 이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결코 무시당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바로 그 은혜의 영광을 위해 나를 여기에 이렇게 놓아두셨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내게 더하시는 모든 상황과 여건과 환경은 이를 위해 조성된다. 몸의 통증도 마음의 번민도 생활의 팍팍함도 궁극적으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으로 주의 힘의 영광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곧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구분을 두시는 일이다. 저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소득과 힘의 논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주의 힘의 영광이 떠나면 멸망의 형벌뿐이다.
당장은 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 같으나 실제로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저희는 친가는 안 가요. 한 아이가 말했다. 조부조모가 살아계시고 아버지 형제분들이 생존해 계신데도 안 보고 산다는 거였다. 아이다운 이해의 한계로 말하길, 우리가 한참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았대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 댁에만 가요. 그러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우리 아빤 명절 때만 되면 이상하게 출장을 가요. 그래서 우린 엄마랑 있어요. 더는 물어보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의 힘의 영광’이 떠난 삶이란 이생에서도 가히 숨길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영광은 창세전에도 계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이 모두는 거룩을 위한 영광에 의한, 영광을 향한 거룩의 발로이다.
곧 내가 이해하기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 세계 범위 너머의 상식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이며 모든 웅대함을 대신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그 이상의 이상이시다. 어디가 유난히 아파 끙, 하고 돌아 누우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이름이다. 기쁘고 즐거워서 툭, 이어지는 탄성의 이름이다.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서도 문득 생각이 머무는 지점이기도 하다. 모처럼 가족들과 모여 즐거우면서도 나의 고단한 몸이 혼자 쩔쩔매면서도 당도하는 바라.
그래서 말씀은 내가 뭘 하든지 그걸 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마치 나의 필요와 욕구를 위해 구하고 바라는 것 같으나 그것으로 주의 영광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다. 곧 내가 주로 만족하는 삶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다.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다. 그래서 무엇에 환장하여 정신 팔리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내 마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마음은 그리 가 있는 것이고, 그러느라 구하는 것이 주의 영광을 위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그것이 될 수 없는 것이어서. 자신은 그럴 수 있다고 여길 때 이미 주의 영광은 퇴색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말씀은 경고한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이미 넘어진 셈이다. 괜찮아 하고 만족할 때 그 위안은 벌써 오염된 것이다. 남들처럼 하나님을 바라고 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하신다. 내게 두시는 마음이다. 그 마음 가득 주가 거룩하여지기를 원하신다. 나의 약함으로 가족들에게 미안해하고 짐이 되는 것 같아 때론 의기소침하다가도 이런 나를 저들에게 두신 것도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한다.
곧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 96:1-3).” 새 노래란 무엇일까? 이미 불리어지는, 남들이 부르는 그런 노래가 아니다. 아무도 부를 수 없고 부른 적 없는, 그런 ‘새 노래’란 내가 나만이 부르는 주께 향한 노래다.
각각의 노래가 어울려 불리어지는 노래다. 그의 기이하심을 모두에게 알리는 노래다. 그래서 또한 생각하기를 가족이란 개개의 별개에서 특별한 구성을 이룬 무리이고, 저들 가운데서도 각각의 하나하나 개체를 이루면서 주를 마주하는 독립성을 갖는다. 같은 우리 사남매의 형제지만 그 성격이나 모양이 다 다른 것처럼, 우리는 하나하나의 ‘새 노래’다. 맡기신 사역과 이를 감당하는 특색이 다 다르다. 물론 우리의 이해와 상식은 공통의 어떤 범위를 구성하지만 누구를 또 어떤 목적을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것은 저는 또 저와 하나님과의 관계라.
“내가 내 영광을 여러 민족 가운데에 나타내어 모든 민족이 내가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겔 39:21)” 저들 눈은 각각이고 이해도 각기 다행하나 ‘자기들의 하나님을 안다.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겠고(22)” 그럴 수 있는 까닭을 오늘 본문에서 읽었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슥 9:16).”
각양각색의 별개인 것 같으나 또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모든 게 다 주의 것이라. 다만 그 질서를 위해 주께서 경계를 정하신 일과를 살고 있을 뿐이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이를 아는 안목의 은혜가 거룩하다. 주를 찬송하게 한다. 주께서 그 영광을 받으신다.
죽음을 턱 앞에 두고 사투를 벌이고 있을 동기 목사와 그 가족을 생각하였다. 이번 설이 이생에서 맞는 마지막 명절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사모하게 하시려고.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사 66:18-19).”
그러저러한 모양으로, 삶의 형태로, 고통의 무게로 또는 감사의 풍성함으로 산다. 가족 간에도 같이 있으면서 얼마나 다른 세계를 부여 받은 것인지 모른다. 나의 고통을 형제가 또 부모가 몰라주는 것 같아 서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저들 또한 왜 자신들이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가 없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내가 췌장암으로 사경을 헤매는 동기 목사의 안타까움을 안타까움으로 느끼는 강도와 실제 나의 직계 가족의 경우였다면 또 다른 것일 수밖에 없었을.
모든 삶의 무게는 서로 다른 지문만큼이나 새롭다. 이때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하나였으니,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는 것.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간혹 내 몸이 힘들어서 나의 고통만 중한 줄 알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은 것이고, 이는 이 땅에서 모두가 공평하게 이해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의 것이라 해도.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이로써 나의 열심은 우리의 열심을 이해하고 격려하며 응원하고 지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시 74:12).” 오늘 말씀을 오래도록 되새기며 생각한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6-1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0) | 2018.02.18 |
---|---|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0) | 2018.02.17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0) | 2018.02.15 |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0) | 2018.02.14 |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0) | 2018.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