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전봉석 2018. 2. 17. 07:17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스가랴 10: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편 75:1

 

 

 

감사할 수 있을 때 감사하자. 주를 바랄 수 있을 때 주님만 바라자.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오는 감사는 앞서서 원망과 불평을 이겨냈던 숱한 감사와 감사가 몸에 뱄기 때문이다. 딱 그 지점에서 주를 바랄 수 있는 마음은 어쩌다 그리 되는 게 아니라 평소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모아 주께로 향하던 무심한 행동과 마음과 생각이 그리 빚어내는 결과이다. 맞춤하니 그 순간 내가 주의 의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하였으나 나의 일상에서 늘 거듭 행하였던 10000번의 막연함이 10001번째에서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동계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도 저들의 좋은 성적이 결코 하루아침에 뚝딱, 생겨난 실력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같은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것이고 그와 같은 연습이 연습으로 이어져서 ‘밥만 먹고, 그것만 한 결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몸에 밴 것이다. 생각은 온통 그것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리 된 게 아니라, 그리 선택하고 애써서 섭렵한 기술이다. 실력이다. 성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들의 무한반복, 무던한 훈련, 무수한 노력의 결실로 메달이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다. 이걸 왜 해야 하나?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따위의 회의와 갈등과 온갖 번민에 의해 얼마나 몸서리치며 살았을까? 그러면서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은 결과이다. 결정적인 순간, 어떤 상황에서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의 마음이 다른 잡념을 이겨낸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단순함의 승리다. 결코 피상적인 게 아니라 실제의 모든 삶이 투자된 결과로써 말이다.

 

가족들이 다들 돌아가고, 아내와 딸애도 처가에 인사를 가고, 나는 혼자 덩그러니 교회에 남았다. 이젠 좀 무던할 법도 한데 마음은 저 혼자 쓸쓸하고 서글펐다. 책을 보다 덮고, 청소를 하다 말고, 소파에 덜러덩 누워 영화를 하나 보려다 그만두었다. 그러다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따고 기뻐하는 선수의 소감을 듣고 저의 일화를 보다 생각하였다. 인기종목도 아닌 전혀 생소한 스켈레톤 부문에서 저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우승을 했다.

 

어느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모습도 그와 같지 않을까?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그래서 우리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신 5:32).”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물어대는 세상에서 우리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누구를 지지하는 정당도 아니고 어느 계파를 우선하지도 않는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 오직 그 까닭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이를 바라고 구하며, 주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또한 그러하다. 그럴 수 있는 게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이 땅에서 한 종목에 전념하여 그 젊음을 또 한평생을 다 바쳐 연마하고 갈고 닦은 저의 훈련은 저의 운명이 되었다. 목표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늘 한결 같았으며, 그럴 수 있었던 게 습관처럼 몸에 밴 삶의 태도에서였다. 결코 우연히 어쩌다 그리 된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하긴 그런 성품에 대한 연구나 나름의 가치는 예수님보다 앞서 350년 전쯤 아리스토텔레스도 주창한 바 있다. 저는 이를 ‘미덕’이라 하였다. 용기, 정의, 신중함, 절제가 곧 저의 기본 덕목이었다.

 

물론 철학의 근간은 이 땅에서의 보다 나은 삶에 있다. 우리와 저희의 것이 다른 것은 영생을 사모하고 우린 더 먼 죽음 너머의 세계를 바라는 데서 비롯된다. 아버지는 설날 설교를 하시며 어릴 적 믿지 않던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 세대의 부질없음을 간증하였다. 하나님 없는 선은 강퍅함에 기초를 둔다. 저마다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모두가 제 살 궁리에 여념이 없다. 악하고 모질다. 이는 대를 이어 내려온다. 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뜻대로 사는 값진 삶의 가치를 말씀하였다.

 

가진 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 아들 녀석이 사귀던 여자애랑 헤어졌다고 하더니, 타국에서 혼자 힘에 겨운 모양이다. 아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마음이 쓰여 안달이다. 녀석은 통화를 할 때도 만사가 귀찮은 듯 성가시기만한 모양이다. 그냥 둬, 나는 아내 곁에서 몸짓을 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나의 부모가 나에게 물려주신 제일가는 유산이다. 가난하고 궁핍하여 때로는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듯하나, 그것으로도 넘치는 복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이를 내가 증거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렇듯 축 쳐져 혼자 교회에서 시무룩해하고 있을 때, 친구네 내외가 지나는 길이라며 아이들 과자꾸러미와 기타, 그리 햄 세트를 설날 선물로 주고 갔다. 저가 그러는 게 친구로서만이겠나!

 

주를 바라며 그리는 일을 하는 데 따른 존중이고 경외일 거였다. 서둘러 또 친척네를 가는 길이라 바삐 헤어졌지만, 주가 돌보심을. 주의 이름을 가까이 두고 사는 데는 주가 이루시는 것을. 그러니 내가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을 가까이함이라. 나의 부모가 내게 물려준 것을 나는 또한 나의 자식들에게 아울러 교회 안에서의 일이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나는 그리 외치며 전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삶,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이와 같은 진리 앞에 새롭게 선다. 날마다 새로운 말씀이다. 이처럼 또, 묵상글을 쓰는 까닭은 그냥, 또, 새로 한 날을 허락하신 주 앞에 먼저 앉아 주를 바라며 사모하는 게 나의 일이어서. 때론 몸에 밴 대로, 습관을 따라, 무심히.

 

그러느라 나는 나를 부인한다. 십자가를 진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잃는 삶이란, 그러저러한 모든 어쩔 수 없음을 다 뒤로 하고 우선하여 주를 바라려는 의지에서다. 저들 운동선수들이 하나같이 늘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을, 어느 분야의 어떤 일에 종사를 하든지 저들마다 늘 거듭되어 숙련되고 단련되어 제2의 천성이 되고 직업이 되고 삶이 되어 운명을 이루어가는, 나를 부인하는 삶. 내 안의 욕구와 온갖 세상을 향한 부러움도 모두 이겨내는 것. 나더러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에게, 나는 주께 감사함이라.

 

주께 감사하고 또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그리하여 나는 오늘 스가랴의 말씀을 그리 듣는다.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슥 10:1).”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은 봄비가 올 때 주께 구한다. 늘 퍽퍽하고 고단한 일상에 주의 성령을, 소낙비를 내려서 내게 두신 밭의 채소를 자라게 하소서. 자라난 채소를 각 사람에게 내어주게 하소서.

 

곧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11).” 주의 뜻을 온전히 알아 바르게 전할 수 있게 하시기를.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2).” 하여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으로 행하게 하소서. 주를 의지함으로 견고하여서 좌로도 우로도 흔들리지 않게 하시면, 다만 주의 이름으로 행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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