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라기 1: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편 80:19
모 기업에서 이월상품을 후원단체에 보냈다 하자. 누가 빵집을 하는데 이틀째 팔리지 않은 빵을 거두어 고아원에 보냈다 하자. 마침 이쪽에 오는 길이어서 누가 교회에 나왔다 하자. 어떤 의무감에 또는 마지못해 그리 한 것을 두고,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 1:8).”
가정예배로 읽은 말씀에서도 이는 명백하였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저들은 그럴만한 걸 한 적이 없다고 아뢴다. 상대적으로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저들은 일일이 기억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일련의 사회 사건을 보다보면 참으로 가관이라. 다들 자기 기준과 판단에 겨워 옳고 그름을 일컬어서 이를 확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잘못’에 대하여도 그것이 왜 잘못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피해자는 넘쳐나는데 가해자는 없는 사회다. 두려운 것은 믿는다고 믿는 사람들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앙적인 신념이 우리를 더 눈멀게 하는 것은 아닌가. 나의 탄식은 저들을 보며 개탄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그게 모두 내 이야기여서 말이다. 나도 다를 바 없어서 말이다.
하물며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저들에게 인사할 때나 마음을 전할 때도 온당하지 못한 것을 피하고 걸러서 가장 눈에 들 만한 선한 것으로 할 텐데. 나의 신앙과 믿음이 삶 가운데서 얼마나 개떡같이 드려지고 표현되는가. 여느 날처럼 아침에 노인은 건너와 우엉차를 내주었다. 이런저런 말을 주로 하는 편이어서 저의 완고함이 어릴 적 가난과 숱한 역경으로 인한 것이구나, 하는 걸 짐작하며 듣는다. 어떻게 주를 전하여야 할지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더 잘 알고 늘 곁에서 ‘그런 믿는 자들’을 보아온 터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오후께는 전에 곁을 같이 쓰던 사무실 사람이 같은 건물에 일이 있었다며 선물을 들고 인사차 들렀다. 보험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자신에게 맞는 것 같다며, 구구절절 그간의 일을 털어놓고 갔다. 나는 저에게도 어떻게 예수를 전하여야 할지 모르겠다. 탈북하여 내려온 뒤 나름 열심을 다해 교회를 다녔었다는 기억이 내가 권하는 말을 쳐낸다. 설마, 나 역시 눈먼 희생 제물로 주께 다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은 개학과 동시에 무슨 진단평가 시험이 있다고 해서 글방에 오지 않았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처음 사람에게 주신 사명이 오늘 날 교회에도 유용하였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그런데 나는 빈 우리만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어떤 막연함과 속절없음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저의 인사가 여전하시네요, 하며 좋은 일을 하고 사시니까, 하는데 되레 욕 같이 들렸다.
두 아이는 어찌 지내는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자꾸 그냥 오라 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어서 나는 저가 돌아갈 때 주차권만 여러 장 건네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0-12).”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면 늘 다행이고 감사하다가도 송구하고 면목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가장 좋은 시간을, 마음을, 몸을, 생각을, 물질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일까? 저는 이 일도 이만큼 했고 주의 이름으로 저 일도 저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마음이 늘 먼저 앞서는 것 같아서 말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 것일까?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말이다.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이를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려고, 그러므로 자라게 하시려고 오늘 나를 여기에 혼자 두시는가.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려고, 아 성도의 기업에 합당한 자로 산다는 것. 먼저는 세상을 보며 환멸을 느끼는 것만큼 나는 얼마나 주 앞에 정결한가, 하는 데서 절망적이다. 전혀 다를 게 없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더 현실도피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혹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낭만적인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고 여기는 안이함은 게으름으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는 혼자 독단적인 판단과 기준을 들이대면서, 맹목적인 삶은 아닐까?
혼자 있으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 때면 송구하고 죄송해서 사는 게 죄를 짓는 것만 같다. 그러는 마음에 휩싸일 때는 정신이 없다. 불안감이 금세 초조함으로 바뀌어서 뭐라도 당장 해야 할 것 같아 좀이 쑤실 때도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때론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말씀이구나!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그게 내 일이라. 우연처럼 또 끌어당겨 읽은 책의 내용이 그것이다. 믿음에는 역사가 따른다.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유아독존 하는 게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시간을 통해 주를 마주하였다. 바울 사도는 이를 강조하였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막연한 구호가 아니다. 사랑은 수고를 담보로 한다. 실천이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말이다.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을 때 소망은 인내로 붙들린다.
이를 끊임없이 아버지 앞에서 기억함이 일이다. 내가 그러는 게 내 일이라. 누구는 종일 운전을 하고, 누구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상품을 권하고 일을 일궈 성과를 내고, 누구는 주방에서 종일 같은 음식을 반복해서 만들고, 누구는 여기서 누구는 저기서 다들 저마다의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나를 택하심이라. 여기에 두시려고 모든 것을 끊어버리셨다. 다 잃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5:8).”
왜 이처럼 성경은 일러 권하고 증명하고 실제의 예를 삼는지 알겠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저마다 같은 갈등과 같은 실망을 되풀이하기도 하는 일이어서, 맞게 가고 있나? 할 때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그렇듯 육신을 따르지 않는 일이 종국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일이기도 하였으니, 믿음과 율법은 하나였다. 동전의 양면처럼 믿음이 있다고 하면 율법을 이루는 생활이 뒤따르게 돼 있다.
저와 같은 논거는 확실한 명제로 정의가 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그래서 주께서 나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을 비추시는구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무엇이 답답한가 했다. 오늘 말라기서는 이를 들려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시는데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식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를 알게 하시려고,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주가 물으신다. 쓰다 남은 걸 주고, 더는 못 팔 것을 선행이랍시고 전달하며, 겸사겸사 교회를 나오고 주를 바라는 이들이 외친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저들은 온통 억울하기만 하다. 뭐라 한들, 그 어떤 증거를 가져와도 진실 된 반성은 없다. 딸 같아서 예쁘다고 한 것이고 잘하라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안아준 것뿐이란다. 다들 관례여서 뇌물인 줄 모르고 받았고, 여전히 애국 운동은 하시느냐? 서로 묻는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7).”
아, 그리고 일러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답답한 심정으로 주가 물으신다(8). 그리고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12).” 그러면서도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주의 질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나는 그래도 한다고 했다며 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나는 주 앞에 엎드려 아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 80:14).” 나를 돌보소서. 나를 오늘 여기에 두시는 이가,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15).”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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