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전봉석 2018. 2. 21. 07:2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스가랴 14:7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편 79:9

 

 

 

문득 생각해도,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러니 주를 바라고 산다는 일은 이 땅 너머의 것으로 그저 막연한 게 아니어야 했다. 그저 그런 확신으로 여기서 열심히 잘 사는 게 전부라면 그야말로 ‘불쌍한 자’일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천국이 아니다.

 

이는 결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당연히 회의도 든다. 의심도 생긴다.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 삶이 나를 여의치 않게 할 때, 당장의 고달픔이 또한 근심이 너를 억누를 때. 아,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 믿음과 소망은 그 확신을 더하고 굳건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뭐라 내가 나서서 판단할 게 아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4:5).” 그래서 부쩍 드는 생각이 미련할 정도로 무던한 것이 복이었다. 얄팍한 생각은 쉴 새 없이 궁리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려 들지만 그러느라 이것저것 판단하다보면 지금의 내 신세가 처량하기만 한 것 같아 순간 의기소침해진다.

 

실질적인 영광,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6:14).” 그러므로 몸으로 직접 드려지는 영광,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내가 나로 할 수 있는 것을 무던히 참고 행하는 삶. 한참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어 저들의 승패를 보며 생각이 많다. 누구는 말하기를 ‘반복의 결실’이라는 표현을 썼다. 초 단위를 쪼개 백분의 일, 천분의 일까지 나누어 승부를 가리는 일이라. 인지 능력에 앞서 본능적인 몸의 반응에 따른 것이니 그렇기도 하겠다.

 

그의 권능으로 나를 다시 살리신 이가, 값으로 나를 산 것이 되었으니 내 몸으로 주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말씀을 붙들고 묵상을 글로 쓰는 행위. 낮 동안 말씀을 붙들고 그에 대해 열거하고 있는 이들의 책을 읽는 행위. 때론 어색한 미소와 친절 혹은 무한 반복을 필요로 하는 아이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훈련돼야 하는 것이다. 6학년 올라가는 녀석을 앞에 두고 글을 쓰게 하는 일, 또는 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 때론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누구를 생각하다 어떤 서운함을 억누르고 또한 주께 아뢰고 고하는 마음의 일, 기도는 참으로 막연한 것만 같아서 가만히 나는 십자가를 응시하고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중보기도야말로 전적인 하나님께 향한 의뢰다. 나를 위한 기도야 늘 지독하게 현실적인 것이어서 수시로 드는 것이지만, 누구를 향한 마음은 일부러 저를 떠올리고 주께 아뢰며 구하고 바라는 수고가 뒤따른다. 그래봐야 저가 알아줄 것도 아니지만, 그럴 수 있게 떠오르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었다.

 

막연함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3:12).” 그런 가운데서도 그치지 않고 거듭 행할 수 있는 게 온전히 주를 바라는 것이고, 그와 같은 의존이 주로 인한 만족이었다. 그런 가운데 내 안에 사랑이 없다면, 곧 누구를 생각하고 위하여 안타까워하는 ‘어떤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종교적 거룩의 행위가 모두 헛것이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하다 생각하였다. 1절에서 3절이 곧 그 말이다.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은사와 능력과 권능과 모든 업적이 다 허사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말로 변죽을 울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2).” 또한 그 앎이 대단하여 지혜와 지식이 차고 넘친다 한들.

 

뿐만 아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 어떤 헌신과 희생도 결국 사랑 없이도 가능하다는 역설, 사랑도 자기 위안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이어지는 사랑의 실제적인 사례가 아름다운 서정시 같다. 그런 걸 과연 내 의지와 노력으로 감당이 될까? 종종 혼자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하고 부를 때의 어떤 서글픔에 대하여는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가령 누구 이름을 떠올리다,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 안에서 저를 생각하는 마음의 손길을 느낀다. 저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안타까워한다. 저는 아예 관심도 없는데 나는 여전하여서 저의 잃어버린 믿음을 주께 아뢴다. 우리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9).” 잊힐 수 있으나 잃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늘 같은 날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정적인 사람이라 특별할 것도 없지만, 아이를 마주하고 앉아 저를 위하는 마음을 배운다. 누구를 생각하다 그리워하는 것 이상의 중보를 배운다. 주를 바라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도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주께서 나를 위하시고 내 안에 두시는 누구를 위한 도우심은 ‘주의 이름의 영광스런 행사’를 위한 것이다. 곧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나를 주 앞으로 부르시고 세우신 것처럼, 살리시고 죽이시는 일처럼,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주께 고한다. 종종 신기한 것은 아플 때 더 주를 바라는 마음이 선명해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통증의학과’를 찾아 검색을 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을 알아두었다. 조금만 더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하고 있으려니까 구슬프기도 하였다.

 

딸애는 면허시험을 하루 앞두고 조용히 나와 공부를 하였고, 덕분에 6학년 아이도 여느 날보다 순순히 논제를 받고 글을 썼다. 종일 나는 앉기도 눕기도 뭐해 어디가 자꾸 아팠는데, 이게 또 짜증스러운 거라. 진통제를 며칠째 한 알씩 먹었더니 속이 울렁거려 한층 더 볶였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나를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는 형국이다. 그런 자가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위해 바라고 구한다는 일이 때론 가상하기까지 하다. 어디가 자꾸 아파서, 아픈 데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 일이야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딸애도 일찍 올라가고 6학년 아이도 돌아간 뒤, 나는 가만히 앞을 응시하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서글픔이 또 원망과 서러움이 일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누구, 누구, 아이들 이름을 적으면서 어찌 지내는지, 저 아이를 어쩌시려는지, 주께 아뢰고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야말로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사람이라.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께 아뢰다 보면 누구 생각이 또 어떤 이가 마음에 밟혀 어느새 저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항상 있는 것,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살면서 이제 사느라 드는 확신이 믿음 없이는 살 수가 없고, 그 믿음의 발판이 성경으로 약속하시는 주께 향한 소망이었다. 믿음과 소망이 한데 어우러져 그 증거는 자꾸 누구 생각을 한다. 남 걱정을 한다. 나나 잘 해도 모자랄 처지이면서, 그래서 이 세 가지는 항상 같이 있을 것이구나. 주의 날에는,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

 

모든 회복의 날이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어쩌면 시상대에 오르는 운동선수들의 특징도 그와 같을 거였다. 저들이 견딜 수 있던 소망을 힘으로 그 영광을 바라는 확신은 버무려져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는 아름다운 영광이 되는 것이었다. ‘주가 아시는 한 날이 이르리니’ 그렇구나.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암담할 때 더욱 선명한 것.

 

자꾸 아프단 소릴 하는 게 좀 그런데, 그럴 때 더욱 주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해지는 것이어서.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더는 아픔도 고통도 그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마음이 더해지고 그러다보면 ‘저절로’ 누굴 떠올리고, 엉뚱한 데 기웃거리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다, 저들의 처지와 환경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기도 노트에 낙서를 하듯 끼적거리며 자꾸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어느새 꽉 차는 확신,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결국은 내가 주를 믿음으로 나의 더러웠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러므로 오늘 시편의 말씀을 주께 아뢰듯 되뇌며 읊조린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