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전봉석 2018. 3. 8. 07:22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태복음 11:26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편 94:11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나는 우리의 허무함을 생각하였다. 진보적이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네, 청렴하고 깨끗하네 했던 이들이라 더 가증스러울 따름이다. 위선적이며 거짓된 것은 내남 없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리라.’ 하는 말씀 앞에 고개를 숙인다. 마음으로야 누군들 못할까? 생각으로야 누군들 스스로 선을 이루지 못할까?

 

또 보면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절박함과 정비례하는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된다. 어려움과 역경이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하는 것이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있었으니, 외형적으로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으나 순응이 순종인 것을 온 생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모든 익명의 비유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였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어려움 속에서 자란다는 것.

 

그래서 누가 말하길 부족함과 고난은 우리의 영적인 친구라 하였구나. ‘부족함과 고난은 우리의 친구다. 우리를 예수의 마음에 묶여 있게 하는 거룩한 핸디캡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일깨운다(-크로포드 로리츠).’ 전날에 묵상하였던 본문, 누가복음 8장의 세 단편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그러하였다. 군대라 하는 귀신이 들렸던 청년 이야기(26-39), 12년간 혈루증을 앓는 여인(43-48), 회당장 야이로의 딸(41).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내 통제 밖의 일들 가운데서 나는 신경쇠약을 앓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처지이지만, 내 자신을 어찌할 수 없어 수시로 좌절하는 위인이지만, 그래서 오직 한 가지 희망은 주의 도우심밖에 바랄 게 없다는 것. 많은 인파가 몰려 숱한 사람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고 손을 댔을 테지만 주의 능력이 나간 것은 오직 한 여인에게 뿐이었다는 사실. 결국은 죽은 생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주님.

 

그 주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차시매 ‘굳은 결심을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누가는 그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막연하여 저절로 룰루랄라 할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는 셈이다.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13:22).” 임박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실 것을 앞두고. ‘굳게 결심하신 길.’

 

일부러 들러야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시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7:11).” 그 길이 어떠할지 다 알고 계셨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18:32-33).” 이 또한 말씀에 순응하시는 거였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

 

묵묵히 걸어가는 길,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19:28).” 아무도 메시아를 그리 짐작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간청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우리가 꿈꾸는 그리스도와 정작 그리스도로 오신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그래서 우리더러 그리스도라 말하지 못하게 하신 것일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눅 9:21).”

 

이런저런 오늘의 사태를 보며, 특히 교회 안에서도 못지않게 ‘미투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하는 주님의 기도를 알 것도 같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 나름 선하게, 옳은 길을 행한다고 자부하던 이들에게 우리는 실망한다.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닌 듯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 ‘아버지의 뜻’이다. 이는 결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 말씀으로 열어 보이시는 것이어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알 자가 없다. 그러게, 다들 참 수고가 많다. 누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누구는 이를 무마하고 희화하여 없던 일로 삼으려 하는, 모든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그 어느 때보다 쉼이 간절한 때이다. 믿음으로 사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해도 안 믿고 사는 일보다는 가벼운 것이겠으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둘러보면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없다.

 

물론 자아를 죽이는 일은 끔찍이도 어렵다. 늘 나도 모르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케케묵은 감정을 끌어올려 푸념을 늘어놓질 않나, 툭 하면 누굴 탓하며 저를 원망하고 서러워하기 일쑤여서.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나를 통제하기 원한다.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 고집하고 바동거린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고통이 날마다 혀끝에 달려 있는 날들이다. 그러나 비로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이처럼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옥에 갇힌 세례요한의 회의와 갈등도 짐작이 간다. 늘 내 안에서는 내가 원하는 메시아를 기대한다. 저는 그리스도라. 나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실 것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제공하실 것이다. 한데 과연 그이가 맞는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자기 확신에 가득한 사람들, 그 신념이 남다른 이들을 경계한다. 그걸 또 남들 앞에 과시하며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음을 내세우려는 이들을 의심한다. 예수께서 물으신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7).” 보긴 보아도 보는 바를 알지 못하고 듣긴 들어도 듣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10).” 우리는 다만 ‘외치는 자의 소리’라.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눅 3:4).” 소리는 흩어져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해도 그 의미는 남겨져서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아이에게 던지는 나의 말 한 마디, 뭐라 일러 ‘아버지의 뜻’을 외치는 자의 소리로써 일었다 흩어지는 것이어서, 어떤 회의가 또 갈등이 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그래서 주를 따른다는 일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으니, 주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일이었구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로써 내가 지는 십자가였다. 그저 살기 위해 아등바등 남들처럼 주어진 운명을 운운하며 짊어지는 따위의 고통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고통으로 인하여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하면서,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오늘 말씀은 이를 깨닫게 하신다.

 

교회 밖에서 살아가는 저들 무리의 악전고투를 보면서 실토하는 이나, 저를 동정하다 의구심을 갖는 이나, 그 당사자로 이를 부인하는 이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그러니 그걸 끝내 묻어두고 살았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제라도 드러내었으니 잘하였다 말해줄 수도 없고. 드러나지 않은 이는 마치 자신을 깨끗한 척 너스레를 떨며 농담으로나 치부하고 말려고 드니, 모두가 가관이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29).” 내 마음과 내 의지로써가 아니다. 주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뜻으로다. 그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 스스로 애써 수고하여 얻은 게 아니었다. 천국은 날마다 침노 당한다.

 

아는 자가 더 많이 갖는 법이다. 주의 마음을 그 아버지의 뜻을 알았을 때,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는 묵묵하였다. 주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이 더 회개치 않는 것이었으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21).” 오늘 이 시대는 값싼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였다.

 

과연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아,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11).” 나의 헛되고 헛됨을 주가 아시오니,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12-13).” 오늘 내게 두시는 어려움이 또 서러움이 더욱 주를 바라고 그의 도우심만으로 감사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내 영혼의 친구라.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16).” 결국은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7).” 이에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9).”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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